일방적인 농민군 학살… 북실전투
동학 교단은 남접 농민군의 과격한 무장봉기를 찬성하지 않았지만 마침내 2차봉기 당시에는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고 남북접연합농민군은 서로 합세하여 공주공방전을 벌이게 되었다. 남북접 연합농민군과 관군, 일본군의 연합세력 간에 벌어진 공주공방전은 6∼7일동안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나, 무기의 현격한 차이로 말미암아 농민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전라도 남부 지역까지 후퇴하고 말았고 해산당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때 같이 후퇴하던 북접농민군은 손병희의 지휘 아래 순창에서 다시 결집하여 임실을 거쳐 장수현에 이르러 읍내를 점거하였다. 장수에서 재집결하여 북접의 근거지인 충청도로 북상하려고 시도하였던 것이다. 북상하던 북접 농민군은 충청도지역으로 넘어와 청산, 황간, 영동 3읍을 함락하고 이 일대에서 주둔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영동, 청산, 보은 등지의 전황은 농민군측에 불리하게 급속히 달라지고 있었다. 무주에서 북상한 농민군 수는 수천을 헤아리고 있었지만 공주공방전에서 패퇴한 이래 전라도 내륙 깊숙히까지 후퇴해서 장수, 무주 등 산속을 거쳐 올라오는 동안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다. 이들의 뒤에는 일본군이 추격하였고 영동에는 급보를 받은 청주병영의 관군과 옥천의 민보군이 진을 치고 북상을 저지하였으며 상주방면에서는 용궁, 함창병과 함께 소모영 유격병대가 지키고 있는 등 북접농민군은 사방에서 포위당하고 있던 형세였다.
용산장터에서 맞붙은 청주병과 농민군은 12월11일과 12일 이틀간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사기가 떨어진 농민군은 패산하여 보은쪽으로 밀리고 있었으며 북접교주 최시형과 통령 손병희 등은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충주방면으로 도피하였다. 최고지도부가 빠져나간 북접 농민군 잔여부대는 대접주 임국호, 이원팔, 김군오, 정대춘 등의 지휘 아래 보은군 산내면(현재의 보은읍) 북실마을(종곡)의 야산 일대에 주둔하여 최후의 항전을 시도하였다. 장안마을은 북접농민군 대군이 떠난 후 관군의 거듭된 보복을 받아 폐허가 되어 있었고 농민군이 주둔할 근거지가 없어져 버린 것이었다. 북실마을은 경주 김씨의 동성동본마을로 경주 김씨 중에도 동학에 들어가서 활동하는 사람이 나왔고 보은의 동학 조직에서 중요한 거점의 하나가 되었으며, 이 북실에 농민군이 몰려와 최후의 전투를 치루게 된 것이다.
12월17·18일 양일간 벌어진 종곡전투의 공격 주역은 일본군과 상주소모영 유격병대였는데 한동안 대치상태에 있다가 요충지에 은신하여 완강히 막던 농민군은 흰옷으로 변장한 유격병대를 같은 편인 줄 오인하고 접근하다가 수십인이 피살된 후 전의를 상실, 공격해오는 일본군과 유격병대에 의해 궤멸되고 말았다. 이틀간으 종곡전투에서 전사한 농민군의 수는 '위난포소폐자(爲亂砲所斃者) 이천이백여인(二千二百餘人) 야전소살(夜戰所殺) 위삼백구십삼인(爲三百九十三人)'으로 기록될 정도로 많았고 노획한 우마의 수도 60여두나 되었다고 전한다. 이에 비하면 공격군의 피해는 경미해서 상주 유격병대의 경우 부상병도 나오지 않았는데, 다시 말하면 북실전투는 거듭된 패배와 오랜 행군으로 말미암아 극도로 무기력한 상태에 있던 농민군이 일방적으로 학살당한 사건이었고 이 결과 10만에 달했던 북접농민군은 그 마지막 명백이 끊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최고 간부였던 대접주 임국호, 이원팔, 정대춘과 핵심 간부 상당수가 전사하였다. 농민군을 학살한 일본군과 관군은 2천6백여 시신을 한 곳에 모아 묻어 버렸는데, 그곳이 바로 강신과 성족 그리고 북실 사이에 있는 작은 골짜기이다. 구덩이를 파고 묻는 작업에는 부근 농민들이 끌려가서 했다고 하는데,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아직 살아있는 사람조차 생매장 당한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오랫동안 이 골짜기는 북실 마을 일대에 사는 사람들에겐 원한이 서린 곳으로 알려져 왔다. 진달래가 아름답게 피고 나물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도 무서워서 가지 못하던 금기의 장소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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