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기운은 저절로 황혼에 물이 드네 : 看花吟 / 도은 이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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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기운은 저절로 황혼에 물이 드네 : 看花吟 / 도은 이숭인
  • 장 희 구(시조시인 문학평론가 )
  • 승인 2014.11.27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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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23】
남자이기에 기풍 당당한 시만 쓸 수는 없는 법이다. 성격에 따라서, 시풍에 따라서, 주위 친지들의 분위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내용의 섬세함은 달라질 수 있다. 대체적으로 남자는 남아(男兒)답게, 여인네들은 정숙한 여인답게 시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키게 된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고려 삼은(三隱)으로 일컬어지는 한 분의 시를 주 텍스트로 삼아보았다. 그의 시풍을 두고 세인들은 여성스럽다고 말하는데 섬세한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看花吟(간화음) / 도은 이숭인
붉은 단풍 시골길 환하게 밝혀주고
맑은 샘물 돌부리를 양치질로 닦아내니
오가는 거마는 없어도 황혼에 물든 산기운.
赤葉明村逕 淸泉漱石根
적엽명촌경 청천수석근
地偏車馬少 山氣自黃昏
지편거마소 산기자황혼

산 기운은 저절로 황혼에 물이 드네(看花吟)로 번역해 본 칠언절구다. 작자는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1349~1392)으로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와 함께 고려 말 삼은(三隱)으로 알려진다. 그는 문사로서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고, 문재로서 고려의 국익을 위해 기여했으며, 시는 후대에 극찬을 받았다. 그의 시는 정연하고 고아(高雅)하다는 평을 받는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붉은 단풍 시골길을 밝혀주고 /맑은 샘물 돌 뿌리를 양치질 하네 / 외진 곳이라 오가는 거마는 없고 / 산 기운은 절로 황혼에 물드네]라는 시상이다.
단풍이 들기 전 서둘러 밀린 일을 정리하고 자연이 한 해 동안 준비해 온 꿈속 같은 가을 풍경화 속에 잠시 들어가 보게 된다. 이 시는 삶의 어려운 국면에서도 위축되지 말고 마음의 안정과 여유를 지니라는 언외(言外)의 가르침을 준다.
시인은 3구인 맑은 샘물은 돌 뿌리를 양치질한다는 표현이나, 산 기운은 황혼에 물들고 있다는 표현은 절묘한 가구(佳句)다. 여기에서는 앞 정도전의 시 ‘방김거사야거’와 비교하여 두 시인의 시의 특성을 비교한다. 가을 경치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여 그 경치를 완상하고 있는 시인의 한적(閑適)과 고적(孤寂)을 전달해준다는 점에서는 두 시의 의경(意境)이 통한다.
정도전의 시는 스케일이 크고 활달하다면, 이숭인의 시는 섬세하고 정교한 맛이 나서 구체적 미감은 차이가 난다. 정도전이 ‘사방 산이 비었다[四山空]’거나 ‘온 땅 가득 붉다[滿地紅]’라고 한 것과 이숭인이 ‘돌 뿌리를 양치질하듯 씻어준다[漱石根]’라고 한 표현에서 보게 된다.
【한자와 어구】
赤葉: 붉은 잎, 곧 붉은 단풍. 明: 밝히다. 村逕: 시골의 아담한 오솔길. 淸泉: 맑은 물. 漱: 양치질하다. 石根: 돌 뿌리. 地偏: 외진 곳, 땅의 저쪽 끝. 車馬: 수레와 말. 少: 적다, 곧 인적이 드물다. 山氣: 산 기운. 自: 저절로. 黃昏: 황혼, 해질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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