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기우리면 구만리 하늘을 날아 건너 칠십 리 서귀포의 밤바다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 마음은 한결 가벼워 졌어도 비어 있는 한 쪽을 아직 다 채우지 못하고 있는 것은 깊어진 이 가을의 서글픈 낭만이 아직도 남아 있는 때문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러한 가을날의 깊은 밤, 하현 반달이 별빛을 숨기고 나의 숱한 생각들을 안고 찾아 와 창문 앞 뜰에다 모래알처럼 하얗게 뿌려 놓을 땐 문득 한 조각이라도 주워서 누구에게라도 편지를 쓰고 싶어지는 마음을 일게 한다. 가을을 노래한 시 한 구절과 함께 노란 은행잎이나 빨간 단풍잎을 봉투에 넣어 보내던 그 시절의 편지는 아니더라도 이제는 보고픈 마음 그리운 마음을 담아서 짤막한 안부라도 물어준다면 이 가을이 한결 예뻐 질 것 같다는 생각이다.
수 없는 만남 속에서 그 모두를 잊지 않고 다 기억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 중에서 잊고 있다가도 가을이면 생각이 나고 보고 싶어지는 사람이 있게 마련인데 오늘은 그 마음의 편지를 받아 줄 사람이 누구였으면 좋을까 생각 해 본다. 이제는 휴대전화가 있고 컴퓨터가 있어 편지 쓸 일이 없게 된지도 이미 오래 되어서 언제 편지를 썼나 싶을 마큼 이지만 설레는 사랑의 마음도, 진심어린 안부도 봉투에 담아 보내주곤 하던 옛날의 그 편지를 다시 써 보고 싶어진다.
오래 전 어떤 일로 부산에서 아내에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는데 아내는 그 편지를 지금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편지 내용이래야 몸은 여기 있어도 마음은 당신 곁에 있다는 말과 아이들과 당신을 사랑 한다는 어찌 보면 상투적인 말일 수도 있겠지만 30여년이 지난 지금 까지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그래도 아내는 그 때 그 편지를 받아본 순간이 행복했던 모양이다. 그 후로는 집을 떠나 본 적이 없는 나는 아내에게 편지 쓸 일이 없었는데 이제는 제주도에서 다시 아내에게 편지를 써 보아야겠다.
지난 달 말, 동양 일보 신문사가 주관 하는 지역 명사들의 애송 시 낭송회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내가 낭송하였던 김남조 님의 시 “밤 편지”의 한 구절 /땅 끝까지 돌아서 오는/ 영혼의 밤 외출도/ 후련히 털어 놓게 해다오/처럼 내 생애의 저 쪽 끝에서부터 돌아서 온 지금까지의 여정이 당신과 함께여서 행복하였노라고, 그리고 앞으로 남은 여정의 끝이 언제 일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그 시간들도 당신이라는 이름이 주는 편안함에 모두를 털어놓고 살아가는 날들이 되기를 소망 한다는 말과 함께 당신을 사랑하다는 말로 마침표를 찍는 편지를 써야겠다.
이제는 10월도 중순이니 날씨도 쌀쌀 해지면서 산촌은 찬 서리에 젖게 되고 그래서 나무들은 새 옷으로 갈아입고 있어도 나목이 되어 부끄럽게 몸을 움츠려야 만 할 나무들 또한 비극의 주인공처럼 무대에서 서러워해야 하는 주연 배우라는 생각도 해 보게 되지만 그래도 아직은 화려한 무대가 펼쳐지지 않았으니 관객들을 위해 더욱 화려한 무대가 펼쳐지기를 기대 해 본다.
/김정범 내북면 노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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