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언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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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언서판
  • 시인 김종례
  • 승인 2014.08.28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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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운차게 뻗어가던 녹음의 물결이 태양의 고도를 비껴가며 주춤주춤 뒷발길질 해대는 요즈음이다. 무더웠던 여름을 무사히 보낸 꽃들과 채소들이 미풍에 너울거리며 웃는 모습도 감동적인 요즘이다. 오늘은 오랜만에 꽃밭과 텃밭 사이를 거닐며, 남편과 주거니 받거니 마당 식구들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무래도 얘는 자리를 잘 잡아줬느니 쟤는 잘못 잡아줬느니 티격태격도 하면서 오랜만에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돗가를 삥 둘러치며 피어난 백일홍의 자리는 참 안성맞춤이다. 창고 귀퉁이에 박아놓았던 목화씨가 대궁을 올려 무성한 잎새로 급기야 하얀 꽃봉오리를 터뜨렸으나, 그 소박하고 정갈한 눈부심을 오늘서 발견한 것도 아쉽다. 남편은 <넝쿨장미가 아무리 요염하고 마음을 끈다 해서 이렇게 가까이 심으면 뭘 하나. 울타리 곁에 심어서 넝쿨을 올려줬어야 제격이지> 한다. 잔잔하고 얌전하게 핀 주머니꽃과 제라늄은 오래오래 눈요기를 시켜주는 기특한 꽃이다. 작은 체구와 애잔한 모습의 딸을 생각나게 하는.... 이런 꽃들은 가까이서 보아야 제 맛인데, 넘 멀리 심어서 흥취가 덜하기도 하단다. 꽃밭과 텃밭 사이를 서성거리며 남편에게 문득 물었다 <우리 며늘아기는 무슨 꽃을 닮은 아이가 올까? 장미와 칸나는 정열적이고 화려하나 금방 시들고, 천리향이나 부용화처럼 듬직하고 속 깊은 아이가 왔으면 좋을텐데~~> 하니까, <이 사람아, 그게 어디 맘대로 되는 건가!> 하며 웃는다. 천리향이나 부용화는 멀리 있어도 그 품위가 은은히 전달되기 때문에 이렇게 현관 아래 바짝 심는 게 아니라고 오히려 핀잔을 듣는다. 나는 은근히 부화가 나서 본격적으로 <신언서판>을 논해 보자고 건의를 하였다. 그동안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면 이 고사성어가 참으로 명문귀인 것이 분명하다. 평생 얼굴을 마주하며 살아도 점 하나 흉터 하나가 오랜 세월동안 서로의 눈에 전혀 보이지 않은 것이 기이하기 때문이다. 실상보다는 눈빛에 묻어있는 마음을 읽으며 사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서로가 무심히 던지고 받던 말(言) 한마디는 가슴에 오래도록 남아 힘이 되기도 생채기가 되기도 하지만, 어느 한 사람의 신체적 생채기는 그리 오래도록 밉지가 않기 때문이다. 말만 잘하면 그 미운 것들도 다 이뻐 보이는 것을 어쩌랴~~ 전해 내려오는 말에 외모는 3일이요. 매너는 3개월이며 머리는 3년이고 성격은 30년이라고 하던 말이 딱 맞는 얘기다. 남편은 <身보다는 言이고, 言보다는 書가 좋아야 하며, 書보다는 判이 제대로 서야 된다는 말이지>한다. 나는 <며늘아기 외모는 그저 보통만 되면 합격이고, 말씨와 마음씨를 우선순위에 두자>고 항의한다. <그리고 정보를 활용 할 수 있을 만큼의 지식은 필요하지요?> 하자, 남편은 <이 사람아, 그 모든 것이 다 갖춰졌다고 해도 마지막 判이 흐리다면, 세 가지도 제 빛을 발휘하지 못할 것임은 명백한 사실이야> 하고 결론을 낸다. 아무리 외모가 출중하고 친절하며 지적인 사람도 판단력이 지혜롭지 못하다면, 그 삶의 과정과 결과가 순탄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당에 채소와 꽃묘 한포기 심는 것도 신중한 판단력을 필요로 하는데, 세상과 사람의 관계에선 더할 나위가 없다. 꽃밭과 텃밭 사이를 거닐며, 내년에는 정말 예들에게 제자리를 잘 잡아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의 判은 언제쯤이나 제 구실을 할꼬? 자책도 해 본다. 나이가 들수록 판단력의 위상이 우리네 삶의 비중을 무겁게 차지함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자는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겉으로 드러나는 형상만을 따르지 말고, 보이지 않는 그림자를 살피면 된다. 그 눈빛에 드러나는 느낌으로 판단하는 것이 정확하다" 그리고“모략 술책 도척 자취 같은 부정적 요소들과 긍정적인 요소들을 주의해서 살펴야 할 것이다”라고 가르친다. 여름내내 나를 바라보며 그들만의 귓속말(言)로 소곤대던 형상들이 소멸의 섭리(書)를 가르치려 하는 이 가을 문턱에서, 저마다의 품고 있는 빛깔(身)과 사랑 이야기가 참으로 다채롭다. 형상뿐만 아니라 그 안에 품고 있는 영혼(判)들과의 이야기로 나의 일상이 고적하지가 않았던 것이다. 신언서판을 논하기에 정녕 안성맞춤인 가을이 저만치서 달려온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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