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훈의 달을 보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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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의 달을 보내면서
  • 이흥섭 실버기자
  • 승인 2014.07.10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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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간 태어나 살아온 세월속을 더듬어 본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자라온 세월 주마등 처럼 살아온 새월이 하나하나 생각해보니 국태민안이라는 단어보다 더 귀중함이 없다. 이씨조선 500년이 고종황제가 일본한테 무너져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고통에 빠져 어쩔수없이 한일 합방이라는 명칭으로 성까지 빼앗기고일본성으로 갈고 정말로 암울한 세상을 살아오며 겪어왔다. 기세 만만한 일본은 우리 옜 풍습까지 없애고 저의 것으로 바꾸고 세계을 다 먹으려고 했을때 우리 어린시절 성까지 다바꿔놓고 우리글가지 배우지 못하게하고 우리들의 목화솜 우리들의 쇠부치, 놋귀명 다 빼앗아가 군용품으로 사용하고 우리는 그시절에 사기숟가락으로 밥을 먹고 산 어린시절의 생각이 생생이 떠오른다. 여자 아이들은 광목공장에 데려간다고 학교 운동장에다 훈련을 시키고 트럭으로 싣고간데는 광목공장이 아닌 홍콩, 싱가폴 외국으로 데려가 군인들에게 몰아넣어 비참한 생활을 하게하고 그시절에는 청년들을 군인으로 끌고가고 중년은 징용으로 끌고갔다. 내나이 17살 어린나이에 우리 부모님들은 출가를 시켰다. 내나이 17살에 시집보내서 정신대는 걱정을 면하고 우리오빠 이창섭은 해군으로 끌고갔다. 무운장구라는 글을 명지판에다 써서 천인침을 뜨러 보은가근 마을을 다니며 한자 무운장구에 천인침을 뜨러 다녀 천인의 손으로 천인침을 떠서 우리 오빠 이창섭 일제 해군으로 뽑혀가는데 가슴에 들러주어 해군을 보냈다. 훈련장소는 진해 바다로 가서 훈련을 했다한다. 그렇게 목화공출 놋쇠, 무쇠 다빼앗아가고 여자 공출 곡물공출 그냥두는것이 없었다. 빼앗아가고 어디함락했다 어디함락했다 기세 만만하게 군가를 지어 학생들에게 군가를 가르켰다. 내나이 87인데 3학년때까지 우리 국문을 배웠으나 4학년부터는 우리 말도 우리글도 못배우게했다. 아이들끼리고 한국말을 하면 벌금 일전식 받으라고 반장한테 시키고 반장은 그렇게 기세가 등등하던 일제 나이흥섭이는 정신대 안보낼려고 우리부모님이 17살에 시집보내고 우리오빠 이창섭은 일본해군 3개월 진해 앞바다에서 훈련받다가 내나이 18세에 8월 15일 해방되어 감추고 있던 태극기가 거리로 나와 만세를 부르고 소리 외치고 풍물이 온 동리를 돌고 웅성웅성 소화가 항복했다 하는 소리 이어져 기쁨에 함성들이 버스도 가다가 동리를 지나면 태극기 흔드는 동민들이 만세부르고 가라면 버스도 멈추고 만세를 불렀다. 기쁨도 얼마가지 못하고 해방이되고 잠잠한데 어느 청년들이 보따리를 작대기에다 걸고 양쪽에서 둘러메고 노랫말이 나가자 동무들아 어께를 걸고 라는 노래를 하며 강신2구 땅고개를 넘은 청년들을 보았다. 땅고개 우리 농토가 있어 들에서 일하는데 보따리 막대에 뀌어 둘러메고 가며 부르던 그노래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러자 우리지도는 허리가 잘리어 남북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서울대학을 나왔다는 분이 매일 중우적삼을 입고 머리에는 무명수건을 동이고 짚신을 신고 짚으로 역은 개통 망태기를 어께에 매고 개똥을 주으러 다녔다. 참기이한 일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얼마 있다 북으로 넘어갔다했다. 사촌형제까지 북으로 갔다했다. 그러자 625가 발발하여 다같은 민족이 서로 총부리로 수많은 인명이 피로 물들어 우리 오빠는 또 대한민국군인으로 일선에 나가 싸워야했다. 참 기구한 운명이였다. 일본군대가서 고생하고 대한민국군인으로 다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싸워야했다. 그대 오빠 이창섭은 아들딸 삼남매를 낳아놓고 백골부대의 마크를 달았다. 우리 어머니는 깨끗한 강변에서 돌을 주어다 장꽝에 쌓아놓고 정한수를 떠다 놓고 무운장구하기를 기원하며 겨울에도 참눌에 세수하고 정성을 드려 얼굴이 다 부으셨다. 그렇게 정성을 드리는데 3개월을 편지한장없어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비는데 애태우는것을 아는 손주는 불숙하는말이 아버지죽었어 하는 말에 우리어머니는 손주라면 이놈 소리 한번안하고 기르는 손주인데 아버지 죽었어 하는 말에 회초리로 종아리를 쳤다. 그렇게 3개월이 넘도록 소식 몰라 더 안타까운 마음으로 정한수 떠놓고 무운장구 빌었다. 그러던 어느날 3개월이 지나 군사우편 이창섭에게서 편지가왔다. 얼마 있으면 휴가간다는 편지였다. 온가족들은 기쁨이 충만하여 휴가오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어느날 머리를 빡빡깍은 오빠가 휴가를 왔다. 온가족들은 둘러않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3개월을 월비산에서 전투를 하는데 산이 높아서 창꽃장아리박에 업슨 고지에서 마른쌀을 반합에 부어 눈을녹여 밥을 해 먹고 잠은 속에 들어가 눈이 많이오면 굴글궁글하여서 자크를 열고나와서 전투를 하고했다하고 옷에도 머리에도 이가 말할수없이 많고 써캥이가 꼭빽이고 이가 말할수 없었다면서 월비산고지를 안빼기려고 3개월을 전투했다하며 가족들은 이 이야기에 답변도 못하고 이야기를 들었다. 산꼭대기서 3개월을 넘게 생활하다 평지에 내려와 걸으니 참이상했다했다. 부대에 와서 목욕하고 옷새로 갈아입고 머리도 깍고 하니 새로운 세계를 사는것 같다고 했다. 살아돌아온것만도 고맙다며 환희에 숨을 쉬었다. 다같은 민족이고 다같은 살속인데 오늘에 이르기까지 총부리 겨누며 통일이라는 두글자는 언제 이루어질지 참 안타까운 심정 인류는 다 한가지일것이다. 일본군대가고 대한민국 군인 업무 충실히 이행하고 고인 이창섭은 7남매 자녀들이 한결샅이 잘사는것을 보고 67세로 세상을 떴다. 옛 위인들도 인생은 굵고 짧게살라는 말 그대로 고 이창섭은 굵고 짧게 살고 인명은 살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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