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운 선생의 일대기를 이야기 하며...
상태바
성운 선생의 일대기를 이야기 하며...
  • 이흥섭 실버기자
  • 승인 2012.01.19 19: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 6일 일찍이 저녁식사를 마치고 침실로 들어갔다.
전화벨이 울려 받아보니 충남대학 국문학과 교수라며 학생들과 함께 집에 방문하고 싶다는 전화였다.
보은을 방문하여 종곡리의 유래를 알고 특히 성운 선생에 일대기와 모현암에 묻힌 대곡 선생을 탐구하고 싶어 온다는 것이었다.
지난번에도 내가 집을 비운 사이 방문한 적이 있는데 이번엔 무엇을 물으러 오는지 부담도 되지만 설레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학생들과 교수들이 도착했다.
대학 교수라는 사람은 이미 여러번 종곡리를 방문한 적이 있고, 조용한 시간에 학생들을 데려오고 싶어 다시 방문한 것이다.
그렇게 만나 우리는 성운 선생의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명종 때 이름 높던 학자 대곡 성운이 세상에 뜻을 버리고 숲어 살던 곳이 바로 종곡리다.
선생은 창녕 성씨로 이름은 운이고 자은 건숙 호는 대곡이다. 1497년 성공감 부정세준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이조에 들어와서부터 많은 학자가 배출되어 명문 집안이 되었다.
조정에 모든 글을 좌우할 수 있다느 매우 영광된 벼슬로 부자가 연달아 선비의 학과에 매화같은 집안으로 존경받는 학자들의 집안에서 태어난 선생은 어려서부터 글을 배워 학문이 뛰어났다고 한다.
원래 선생은 성품이 온순하였고, 뜻과 기상이 장하여 학문도 깨끗하고 맑았다.
퇴계 이황이 숨어 있는 성선생이라고 부른 이가 바로 선생을 말한 것이다. 또 선생은 1531년에 사마시에 올랐으나 1545년 명종원년 사화로 그의 작은형 경제 근이 모함을 받아 형벌을 받다가 죽은 뒤 세상의 뜻을 잃고 처가 고장인 종곡리에 내려와 종산 아래 집을 짓고 현판을 걸고 숨어버리니 그의 호가 되었다.
명종이 즉위하여 광릉 참봉을 제수하고 조정에 나올 것을 권하니 선생은 병들었다는 핑계로 사양하고 대곡제에서 한발도 옮기지 않고 처형인 김제군수 김천부와 김천우 형제의 아들을 비롯 한일가 자제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외딴 골짜기에서 30년을 사는 동안 몇 번이나 조정에서 벼슬을 주며 불렀으나 끝내 사절하고 한가한 때면 소를 타고 거문고를 즐길 뿐이고 혹여 사람이 들으려 하면 타지 않았다. 속리산으로 들어가 몇날씩이나 산수를 즐기며 노닐다가 돌아오곤 하였다.
선생이 이렇게 은거하고 있는 동안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깊은 골짜기지만 선생을 흠모하고 사랑하는 벗들이 줄지어 찾아오기도 하였다.
대학자 치고 안 찾은 이가 없었으니 덕성이 하늘로부터 종곡에 떨어졌다고까지 했다.
평생을 욕심 없이 읽는 것을 낙으로 삼고 노환으로 83세에 세상을 떠나자 이 소식을 듣고 관에서는 후한 부의를 내고 장례하도록 명하였다.
지금도 처가 김씨 문중에 후예들이 10월이면 토지에서 보조받는 기금으로 시제도 훌륭하게 차리고 봄이면 모현암 축제로 크게 먹을거리를 장만하여 서당계라 칭하고 축제로 즐긴다.
지난 6일 밤 충남대학 국문학과 교수와 학생들과 성운 선생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 후 그들은 온 곳으로 돌아갔다.
/이흥섭 실버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