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순왕릉 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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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릉 내력
  • 이흥섭 실버기자
  • 승인 2011.12.01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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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은 제56대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 성은 김, 이름은 부이다.
신라 문성왕의 후손으로 927년 경애왕이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사망한 후 왕위에 올랐다.
경순왕이 왕위에 오를 당시에는 국가가 후백제, 고려, 신라로 분열되어 있었고 특히 후백제의 잦은 침입과 각 지방 호족들의 활거로 국가 기능이 마비되는 상태였다.
이에 민심도 신흥 고려로 기울어지자 경순왕은 무고한 백성들이 괴롭힘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신하들과 큰 아들 일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려 왕건에게 평화적으로 나라를 넘겨 준 후 왕위에서 물러났다.
이후 태자 일은 금강산으로 들어가 마의를 입고 풀뿌리와 나무껍질을 먹으며 보냈다고 하여 훗날 일명 마의 태자라고 불렸다.
고려에 나라를 귀부한 경순왕은 태자보다 높은 지위인 정승공에 봉해지는 한편 유화궁을 하사받고 경주의 최초 사심관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고, 귀부한지 43년 후인 978년 고려 경종 3년에 세상을 떠났다.
비보를 접한 신라 유민들이 장사진을 이루며 경주로 장례를 모시고자 하였으나 고려 조정에서 왕의 구는 백리 밖으로 나갈 수 없다하여 고랑포리 성거산에 왕의 예로 장례를 모셨다고 한다.
경순왕릉은 신라의 여러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경주를 벗어나 있는 것으로 고랑포 나루터 뒤편의 남방한계선과 인접한 나지막한 구릉의 정상부 쪽에 단독으로 위치하고 있다.
경순왕의 사후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잊혀졌던 것을 1747년 조선 영조 23년 후손들이 왕릉 주변에서 묘지석을 발견하여 되찾게 되었다.
따라서 경순왕릉은 조선 후기의 양식으로 재정비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으며 봄과 가을 두차례에 걸쳐 제례가 행해지고 있다.
경순왕릉 주변에는 1986년 건립된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의 재실 건물과 경순왕릉의 것으로 추정되는 비가 비각 안에 놓여있다.
경순왕릉의 전체적인 형태는 조선 후기 사대부 묘소의 전형적인 격식을 보이고 있으며 왕릉의 강이 조성되어 있을 뿐 주변의 식물들은 모두 조선 영조 때 만든 것이다.
능상은 원형으로 32매의 호석과 장방형의 곡장을 두르고 있으며 능의 전면에는 2단의 계체석을 갖추고 있다. 상단 계체석 위에는 능상 앞으로 능표와 상석이 놓여져 있다. 중단에는 네 면에 사각 화창과 팔각지붕 형으로 옥개를 얹은 장명등이 직선상에 놓여져 있고, 그 좌우에는 석양과 망주석이 하나씩 서있다. 곡장과 호석은 형식과 문향의 형태로 보아 일제강점기인 1932년 보수를 하면서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경순왕릉 주변에는 경순왕릉 신도비라고 전해지는 대리석재의 비석이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은 원래 고랑포구 주변에 방치되어 있던 것으로 1976년 고랑포초등학교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1748년 영조 24년 후손들이 발견한 신도비로 추정하여 1986년 비각을 짓고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비의 마모상태가 심하여 현재 한쪽 면에서만 몇 개의 문자가 판독될 정도로 내용은 전혀 알 수 없다.
비석의 건립연대는 모르지만 형태로 보아 조선 초기의 거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흥섭 실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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