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의 아픔 가슴에 안고 살다 간 정수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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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의 아픔 가슴에 안고 살다 간 정수할머니
  • 이흥섭 실버기자
  • 승인 2011.03.24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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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할머니는 옥천군 소정리 연일 정씨 가문에서 태어나 행심과 본백이 투철하게 교육된 여인으로 일제 말기 보은군 북실 종곡리의 효자 정문안집으로 시집 와 시아버님 김한구씨와 시어머니 백천 조씨와 함께 대 종가집의 맏며느리로 남편 김홍길씨와 대가족을 이루고 생활하게 되었다.
남편 김홍길씨는 서울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 조교로 근무하다 청주 사범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두 부부는 누구도 부럽지 않은 안락한 가정을 꾸리고 서로의 사랑도 말할 수 없이 깊었다. 슬하에 2남 3녀 자녀를 두고 시부모님과 집안 어르신들에게도 칭찬이 자자했다.
그러던 중 일제가 대동아 전쟁으로 득세하여 일본군은 조선을 한일 합방으로 명칭하고 홍콩, 싱가폴까지 점령하자 미국이 원폭으로 오끼나와 히로시마에 폭탄을 투하해 일본 소화는 즉시 항복하여 815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뿐, 우리 한반도는 타국인들의 권리로 허리가 잘리고 말았다. 다 같은 민족이요, 다 같은 형제인데 북쪽은 사회주의 국가 남쪽은 자유민주 국가로 서로가 다른 이념으로 우리 민족들에 뼈져린 아픔과 슬픔을 안고 이산가족으로 도단에 빠져버렸다.
김홍길 교수는 사회주의 국가를 선택하여 쫓기게 되자 농민 행세를 하며 지내다 어쩔 수 없이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 그리고 부모님 곁을 떠나 월북하였다.
정수할머니는 시부모님과 자식들을 잘 부탁한다는 남편의 말을 전해 듣고 함께 살아가고 있었는데 남쪽 조사반이 날로 찾아와서 고통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사실대로 대답하여 시아버지 김한구씨는 밤을 새워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보은군내에선 선비의 집으로 정문안집 자손으로 후에 양성이 투철함으로 이산의 아픔과 많은 고통 속에서도 정수할머니는 불 꺼진 사막 같은 삶을 한평생 살아온 것이다.
그러나 정수할머니는 홀로 청춘을 보냈지만 한 치도 흐트러짐 없이 부모님을 공경하고 자식들 교육에 몰두하는 마음은 타의 모범을 보였다. 남편의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며 살아왔다고 이야기 했다. 어디를 가도 손색없는 삶을 산 정부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투철한 삶 속에 그렇게 사랑하던 남편을 생사도 모르고 애타던 중 친구에게 남편이 북쪽에서 결혼하여 아이를 두었지만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수할머니는 남편과 함께 살았다는 그 사람들이라도 만나보았으면 했다. 남편을 보필해 주어 고맙다는 인사나 해보았으면 하고 아이도 남편의 아이이니 만나봤으면 했던 것이다.
이산의 아픔을 가슴에 안고도 평생 흐트러짐 없이 살아간 이름 정수. 그는 어떠한 아픔도 내색하지 않고 타의 모범을 보이며 저 세상에 간 한 맺힌 여인이다.
아들 김중식 박사는 그렇게 훌륭하게 모범을 보여주고 교육을 시키고, 96세의 일기로 가신 어머님의 산소에 석물로만 보답하였다.
온 동네 어르신들이 모여 상돌에 정수라는 본관은 연일 정씨 외자이름 수라 했다.
맑은 물 같이 살아간 여인 오아시스를 찾지 못하고 사막에 놓인 정수할머니.
/이흥섭 실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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