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둑길을 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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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둑길을 달리며
  • 송원자 편집위원
  • 승인 2010.09.30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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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전부터 밤낮으로 풀벌레소리가 내게 가을이 왔다고 속살거렸고, 아파트 앞의 분홍빛 과꽃이 “가을이야!”하며 하얀 눈웃음을 쳤지만 난 시침을 뚝 떼고 있었다. 그런데 상큼한 바람이 흰 구름이 두둥실 떠다니는 투명하고 파란하늘 위에 가을편지를 뿌려 놓았다. “오늘은 가을 들판을 달려 보아요. 멋진 풍경이 그 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또 추억 찾기도 해 보세요.” 난 그 편지를 읽고 기대감으로자전거를 타고 동안이들과 보청천 사이에 난 둑길을 나섰다.
길바닥이 울퉁불퉁한데다가 마른 풀들이 깔려있어 자전거 바퀴가 잘 굴러가지 않아 다리에 힘이 들고, 덜컹되어 엉덩이는 아프지만, 주변을 천천히 볼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내 볼에 스치는 바람과 온 몸에 쏟아지는 따스한 햇살이 한결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었다. 벚나무 가로수에 참새와 까치 비둘기 등이 앉아 있다가 나를 앞서 푸드득 거리며 날아간다. 내 소리에 놀랐을까 계속 나를 앞선다. 보청천에도 황새와 이름을 모르는 물새들이 노닐고 있고 억새와 수생식물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억새를 바라보며 기억의 창고 속에 쌓아 놓았던 한 가지를 살짝 꺼내 보았다. 20년도 훨씬 지난 때 지금처럼 억새가 피고 있을 무렵이었다. 괴산 청천 어느 마을에 출장을 갔는데, 계곡 주변에 억새가 흐드러져 있었다. 그걸 바라보며 탐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있던 남자회원이 며칠 후 한 아름 꺾어다가 내게 주었다. 사무실에 있던 동료 직원들도 아름답다고 했고 난 정말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걸 안고 길을 걷고 시내버스에 오르는 동안 만났던 사람들의 반응도 하나 같이 정말 예쁘다는 표정과 말을 붙여 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 갈대는 신혼집에 1년이 넘게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억새는 더 피어 몽실몽실한 느낌을 주었고 그걸 바라보면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그런데 시간이 더 지나다보니 하나둘씩 날리기 시작하여 끝내는 버리게 되었다. 그 때 받았던 한 아름의 억새는 정말 감동적이었다. 그 남자회원이 내가 갈대를 갖고 싶다는 말을 듣고 그 갈대를 자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순수함과 정성스런 마음을 담았으리라 생각한다. 지금은 마을이름도 그 남자회원 이름도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때 내가 받았던 그 억새를 정말 좋아했고 고마워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도 그 누가 내게 이런 마음을 담아 억새를 한 아름 안겨줄 사람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픽 웃고 말았다. 아직도 그런 발상자체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좀은 유치하다고 할까.
그렇게 둑길을 가며 많은 것을 만났다. 나를 성숙하게 만들었던 징검다리의 흔적을 찾아보기도 하고 아침이슬이 내린 길과 가을 안개 속을 걷던 소녀시절도 떠오르고, 둑길 옆과 논둑길과 농로양옆에 심은 고구마며 콩과 팥 그리고 들깨에서 고소한 냄새를 맡기도 했다. 길옆 나무를 타고 나팔꽃이 피었고 보랏빛 쑥부쟁이도 계절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동안이들의 벼들은 익어가고 있었다. 익은 벼는 머리를 숙이는데 난 늘 익지도 못한 상태에서 머리를 빳빳하게 들고 생활하고 있다는 생각을 종종하게 된다. 나이에 걸맞게 이해심과 넉넉함을 베풀어야지 다짐을 하지만 생각뿐이고 이미 행동은 그러하지 못할 때가 많다. 인내심을 필요로 할 때도 기다리지 못하고, 때로는 많이 의지하고 믿었던 사람에게 사소한 일로 서운해질 때도 있다. 사람의 관계를 보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또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있고 그 관계에서 나보다도 더 돈독한 끈으로 이어지고 있을 수도 있는데 그것이 이해는 되면서 마음은 아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배신감 같은 것을 느끼면서 과잉친절을 베풀지 말아야지 하곤 하는데 사실 아주 쓸데없는 일종의 소유욕과 그저 나만을 인정해 달라는 이기심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남에게 베풀 때, 댓가를 전혀 바라지 않고 내가 좋아서 한다고 하지만 그러하지 않은 것 같다. 상대방에게 주는 친절과 호의를 그저 무조건적으로 하고 그 이후 기대를 하지 않으면 편한 것을 말이다. 이렇게 하찮은 일로 마음을 쓰는 내가 싫고 언제쯤 이런 일을 잘 극복할 수 있을지 한심해질 때도 있다. 그래도 후회와 반성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조금씩 누런 벼이삭처럼 익어갈 거란 기대도 해본다.
이제 곧 벼들은 수확을 하게 될 테고 논 군데군데에 짚가리가 쌓이게 될 것이다. 그렇게 텅 빈 들판에 찬바람이 불고 또 그렇게 시간이 가다보면 잠자고 있는 동안이들이 하얗게 단장을 하는 날도 오리라. 그 때 난 회색빛 하늘에 쓴 겨울편지를 읽게 될 것이다.
“바람이 쌩쌩 부는 넓은 들판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 들길에 서서 하얀 눈을 맞아 보시지 않을래요?”
청명한 하늘아래 물소리 바람소리 가을의 속삭임과 잠자리가 맴도는 둑길을 따라 난 자전거를 타고 달리고 또 달렸다. 가을! 가을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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