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조를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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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조를 바라보며
  • 김종례(문학인) 
  • 승인 2022.12.22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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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터인가 해질 무렵에 동네 한 바퀴를 걷는 습관이 저녁커튼을 내리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졌다. 퇴직 후부터 건강을 지키기 위한 운동시간이기도 하지만, 서산으로 넘어가는 일몰의 풍광을 보기 위한 언덕 오르기가 일과의 즐거움이 되었다.  저녁나절에 지는 해를 뜻하는 유사한 단어로써 해넘이, 일몰, 석양, 낙양, 낙일 등이 있으며, 이때 서녘 하늘을 곱게 물들이는 차일풍광을 노을이나 낙조라고 부르기도 한다. 노을은 다시 아침노을과 저녁노을로 구분되기에, 서해바다에서 만나는 신비롭고 환상적인 낙조에는 비교할 수 없지만, 붉은 조명처럼 내려앉는 동지낙조를 만나보는 오늘이다. 비우고 다 비워서 다분히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풍광을 바라보며, 나도 빈 잔을 들어 축배를 나누고 싶어진다. 
  나를 흥얼흥얼 따라오다가 너울너울 무도회도 열다가는 겨울 숲속에서 잠시 숨을 돌리는 중이다. 그림자 길게 누인 겨울나무 빈 가지들 사이에 매혹적으로 걸려있는 꽃 단지라 할까! 후루룩거리며 나목을 떠나는 철새 무리들이 어필되어 시적이라고 해도 좋겠다. 숨어 울던 새들조차 침묵의 망년회를 여는지 겸손하게 웅크리면, 소용돌이치던 내 그리움도 외로움을 안고 잠이 드는지 적요하다. 낙조를 마주할 적마다 늘 삶의 불확실성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았지만, 존재에 대한 연민과 과부화의 잣대를 내려놓고 가볍게 가라는 대답만 듣게 된다. 
  한국문단의 원로시인이 낙조 앞에서 노래한 두 편의 시 귀절이 비교되는 순간이다.‘해에게도 붉은 치마가 있었음을 알았네. 저 세상, 아마 끔찍이도 사랑하는 이가 있는 곳. 거기에 갈 때마다 붉은 치마를 입고 치장한다는 걸 알았네. 해에게도 사랑이 있음을 알았네. 저녁마다 아름답게 단장하고 사랑의 나라로 가고 있음을 알았네.’상상의 나래 가득한 감성적인 청년기에 쓴 함뿍 빠질 만큼의 애절한 사랑의 노래라 생각한다. 또한‘마치 백제무덤의 무령왕과 왕비의 옷이 광활한 허공에서 한 장의 허공이 되고, 한 장의 연기가 되어, 발가벗은 혼령을 따스하게 입혀주는 한 장의 질긴 노을이 아닌가!’고 묘사한 부분은 나이 든 이들의 영혼의 승화라 할 만큼, 깊은 성찰과 사유가 배어있는 핏빛 울음이라 하겠다. 
  나도 낙조를 바라보는 시각과 방향이 세월과 함께 변모하여 왔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지구를 지킨다는 과학적인 이론과 위대한 자연의 조화에 마음을 빼앗겼던 학창 시절, 낙조를 향한 철새들의 힘찬 날갯짓이 열정과 소망으로 다가오던 중장년도 소낙비처럼 지나갔다. 이제는 저리도 붉은 절정에도 가슴이 뛰지 않는 현실주의가 되었는지~ 허공을 떠도는 가벼운 유성이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저 묵묵히 바라볼 뿐이다. 달도 차고 넘치면 기울어지듯이 내일이면 다시 떠오를 태양이라며 ~ 어린아이의 관조로 돌아가는 자신을 알아차리며 언덕을 내려온다. 
  텃새 몇 마리 빈 감나무 가지를 흔들어대는 작은 정원에 서노라니, 지나간 계절 속 다채로운 풍경들이 시네마 필름처럼 스쳐간다. 씨앗을 뿌리며 소망의 한해를 기약하던 봄날은 윤기 가득히 채워주던 진록의 계절을 지나서, 붉은 물 홍건하게 고이던 가을도 보내고 예까지 왔음이다. 부정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느새 새해를 맞이하는 한해의 종착역을 바라보는 시점이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 하여도 저마다 화룡점정의 붓을 들어야 할 동지쯤이다. 한해의 어려움과 고통은 우리가 살아 있었다는 증거일 테니, 그 문제를 헤쳐 나가는 지혜까지 주셨을 그 분의 뜻을 고민하면서 말이다. 서산에 도착한 내 삶의 여정처럼 저리도 순식간에 내려앉는 낙조를 바라보면서, 지나온 한해를 잠재우고 계묘년을 향한 가난한 기도를 드리고 싶어진다. 누구나 지금까지 반복되었던 그런 새해가 아니라, 남은 삶의 이정표가 되어주는 새해이길 기원해 보는 12월의 노래를 ~ ~
‘적막을 깨며 다가오는 벽두새벽에 깨어있는 이들의 간절한 기도소리 들려오리. 한해의 격동과 요란스런 세상함성에 묻혀 들리지 않던 노랫소리 겨울 숲을 채우리. 미처 풀어내지 못한 생의 매듭은 얼마나 더 흔들려야 새 아침은 오는가! 자유의 빈 손짓 가득한 겨울풍경 속에서 부르는 소망의 노랫소리 아름다운 시가 되리라. 가슴을 파고드는 애절한 기도는 피멍 든 영혼마다 치유사가 되어라. 섣달그믐 빈 허공으로 떨어지는 마지막 낙관처럼 고요하나 장엄한 풍경화가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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