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처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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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
  • 오계자(소설가)
  • 승인 2020.03.12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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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소식은 영등할망의 치맛바람이 배달한다. 바람이 잦은 걸 보니 영등할망이 내려 오시나보다. 딸을 데리고 오면 바람을 일으키고 며느리를 데리고 오면 비를 뿌린다는데 올해는 심하지 않는 바람과 고운 봄비를 동반하고 있으니 딸과 며느리가 다 따라 오나보다. 덜거덕거리는 소리에 마당으로 나가서 이것저것 살피다가 맷돌이 눈에 띄었다. 내 아픈 추억 공간에 버티고 있는 밉상이다. 나도 모르게 동작을 멈추었다. 
길을 잃은 내 시선이 허공에서 맴돌고 있다. 하늘보다 낮지만 하늘보다 아득한 허공. 내가 넋을 놓고 있으니 시선도 자연스레 길을 잃은 것이다. 넋을 놓은 것이 아니라 먼 옛날의 추억에서 헤매고 있는 게다. 그땐 자신의 존재에 대한 생각조차 없는 삶이었던 것 같다. 눈앞에 닥친 문제들이 하도 기가 막혀서 머리는 텅텅 비었고 꿈이나 어떤 목적도 개념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야말로 일엽편주에 몸만 실려 있었던가 싶다. 개념 없이 스쳐 보낸 내 일생의 시간들을 물레 돌리듯 한 올, 한 올 풀어보니 참으로 사연도 많고 아쉬움도 많다. 바보같이 살아온 것이 아니라 견뎌왔다.
   
  풍습과 환경이 많이 다르기도 하지만 전기도 없는 시골생활은 상상도 못했다. 하루, 하루가 좌불안석이었다. 수개월이 지나도록 정신적인 안정을 찾지 못하던 새댁이 첫 명절 준비로 두부를 만들기 위해 불린 콩과 맷돌을 사이에 두고 어머님과 마주 앉았다. 긴장된 새댁은 어처구니를 잡고 어머님은 불린 콩을 한 국자씩 맷돌의 아가리로 넣기 시작하셨다. 두 손으로 있는 힘을 다했지만 맷돌은 돌다말다 맥을 못 춘다. 보다 못한 어머님은 쯧쯧 혀를 차시며 어처구니를 잡고 같이 돌리신다. 제법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데 어쩌면 콩 한 알 떨어트림 없고, 반 박자도 어긋남 없이 정확하실까.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어처구니가 쑥 빠져버렸다. 어머님은 천으로 감싸고 맷돌과 어처구니 사이에도 헝겊을 넣고 망치로 치며 탄탄하게 잘 박으셨다. 몇 바퀴 돌리다가 또 빠졌다. 그렇게 세 번째 빠졌을 때다. “어머님, 힘이 좋으신 어머님이 밑에 잡으시고 제가 위에 잡을 게요. 윗부분에 더 힘이 강하니까 자꾸 빠지는 거 같아요.” 말씀드리자마자 “얼마나 갈았다고 그새 꾀가 나냐?” 하신다. 나는 자꾸 빠지는 원인을 생각해보고 논리적으로 말씀드렸는데 일이 이상하게 꼬였다. 윗부분을 쥐고 돌리면 힘이 주어지는 각도가 딱 어처구니의 바탕을 꺾어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지만 “누구를 가르치려고 하니?” 정말 어처구니 때문에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눈물도 땀도 닦을 틈 없이 악을 쓰며 어처구니를 돌렸다기보다는 매달린 기분이었다. 그해 추석의 두부는 새댁의 눈물덩이였다.
  맷수쇠에 붙들려 꼼짝없이 벗어나지 못하는 위짝이 어처구니를 거부한다고 해서 자유로워 질 수 없듯, 내가 이 생활에서 도리질을 하고 벗어난들 마음 편한 세상을 보장 받을 수는 없다. 누가 나를 어처구니 감싸듯 헝겊으로 맞춰 주랴. 내가 나를 보듬기로 작정을 하고 시골 생활에 정을 붙이기 시작했다. 
난생 처음이지만 도리깨질도 많이 해본 솜씨라는 칭찬까지 받으며 잘 해냈다. 그냥 잘 한 것이 아니라 톡톡 튀며 콩깍지를 벗어나는 콩을 보면 재미있고 흥이 나는 일이다. 날 여기까지 데려다 놓고 뒷짐 짚는 남편 엉덩이라 생각하며 신나게 패대기쳤다. 도리깨의 원리를 알면 쉬운 일이다.
절구질은 물론 뽕잎 따는 일도 거침없었다. 학창시절 친구네서 체험한 적이 있는 디딜방아는 잘못하면, 방앗공이에 맞춰 확에 손을 넣는 사람의 손을 크게 다칠 수 있는 일이라 아주 조심조심 박자를 맞춘다. 시골 일은 무엇이든 기구의 원리만 터득하면 못할 것이 없다. 하지만 딱 하나 맷돌질만은 못하겠다. 팔 힘이 모자라도 너무 모자란다. 나는 나대로 견디기 힘든 생활이었지만 하나에서 열까지 성에 차지 않는 며느리 때문에 어머님은 어머님대로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어머님의 심정을 그때는 생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서러워했다. 세상어머니들의 향기는 왜 멀리 지나와서야 느낄까. 싱싱할 때보다 쭈글쭈글 마르면 더 매력적인 향을 발산하는 대추 향기처럼 말이다. 
잃어버린 내 시간들, 삶의 도형들을 차곡차곡 모아서 진솔한 이야기로 엮다보니 늙은 대추 같은 매력은 없어도 추억의 이야깃거리가 제법 많다. 가버린 내 시간들의 흔적을 쓰다듬는 지금, 눈은 촉촉하고 입은 미소를 띠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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