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잔의 축배
상태바
빈 잔의 축배
  • 김종례(시인, 수필가)
  • 승인 2019.12.26 09: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파리들을 훨훨 털어버리고 하늘을 향하여 빈 손짓을 해대는 겨울나무를 마주한다. 오래 정들었던 둥지를 떠나가며 빈 날갯짓을 해대는 창공의 철새들을 바라본다. 겨울의 쓸쓸하고 텅 빈 풍경을 바라보노라면, 혼탁한 세상과 하나가 된 자신의 참모습도 투명하게 드러남을 깨닫는다. 12월의 마음은 거울을 마주한 듯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말갛게 투영시키나 보다. 간신히 버티고 있던 까치밥 하나도 제 얼굴을 점점 지워가며 그리움을 내려놓은 지 오래이고, 빈 가슴 구슬프게 울어대던 풀벌레도 모든 걸 체념하고 제 무덤을 찾아 떠난 지도 오래인데~~ 시간은 어김없이 벽두새벽을 향하여 질주하면서 마지막 가속페달을 밟아대는 중이다. 기해년의 묵은 찌꺼기들을 겨울외투 벗어던지듯 툭~ 털어버리라고 당부를 하면서 말이다.
 가을바람에 마른 검불때기들이 낮은 자세로 주저앉았던 11월이 사색의 달이었다면, 자유의 빈 손짓 가득한 12월은 빈 그릇을 준비하던 비움의 달이라 할 수 있다. 환부의 통증처럼 여기까지 매달려 온 삶의 족쇄들을 깨트리고 싶어지던 달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마지막 매듭을 풀기 위하여 자신만의 비움과 채움의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하던 달이기 때문이다. 뒤틀리거나 과부한 욕망이 없었다면 어찌 고통인들 있으랴만, 다시 세우기 위해선 철저히 비워내고 깨트려야 하는 當(덧말:당)無(덧말:무)有(덧말:유)用(덧말:용)이나
不(덧말:불)破(덧말:파)不(덧말:불)立(덧말:립)의 시점이라 할 수 있다.
 나도 연초부터 헉헉대며 따라오던 삶의 흔적들이 아지랑이처럼 가물거리니, 의미 있었던 순간들은 깊은 호수가 되어 어디서 충만히 고여 있기를~~ 고통과 수난의 기억들은 바람에 실려 어디론가 멀리 떠나기만을 바라는 요즘이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온 몸을 휘감는다. 12월의 바람 속에는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의 찬 물결 숨소리가 떠 밀려왔는지 회한의 눈물이 일렁댄다. 이 겨울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고요한 강물위에 12월의 마음을 띄워 보내고 싶어진다. 저마다의 가슴 속 매듭의 앙금을 깊은 강물에 풀어놓고 벽두새벽에 새 깃발을 세우기 위해서다.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소망의 불씨를 피워내고자 불어오는 바람이니까 그러하다. 
 설령 일상의 잔해들을 채 비워내지 못하여 버겁고 무거운 내일이 다시 온다하여도, 우리 모두는 절망의 늪 속에서 빠져나와 소망의 언덕으로 가는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설령 새해에도 작심삼일이나 조령모개의 삶을 탈피하지 못할지라도, 우리 모두는 경자년 새날에도 제 본연의 임무를 완주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기해년 지난 과거에도 너무 집착하거나 경자년 미래에도 목숨을 걸 일은 아닐 것이다. 유리창 넘어 파란 창공처럼 투명한 현재는 또 다시 과거가 될 것이고, 불확실 불투명하게 다가오는 미래는 다시 현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가치를 정립하고 재발견 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뿐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촛불을 끝까지 지켜내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는 모두를 바라보니 그러하다.
 나도 가속페달을 밟아대는 무심한 세월에게 빈 손짓을 흔들어 축배를 들고 싶은 요즘이다. 한가닥 그리움도 미련 없이 내려놓고, 조명처럼 내려앉는 마지막 석양 앞에 우두커니 서고만 싶다. 모두를 비워낸 가벼운 빈 몸짓으로 너울너울 살풀이 한마당 풀어내고 싶어진다. 빈 울림으로 자서전을 써 내려가는 겨울 수묵화 한 가운데 서 있어도 감사하는 마음의 여지가 생겨나지 않겠는가. 침묵하며 떠돌아다니는 낙엽의 빈 몸짓처럼 허공을 떠도는 유성이 된다면 또 얼마나 홀가분하랴!
무거웠던 기해년의 짐 보따리를 홀가분하게 내려놓고, 12월의 빈 잔을 높이 들어 진정한 깨달음과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야 또 오죽이나 좋으랴!
 한해 동안 거세고 어지러운 파도 속에서 우리의 메마른 가슴은 충만한 사랑을 갈구해 왔다. 우리의 뇌는 참된 진리를 찾아 올바른 인격과 양심과 사랑이 회복되기를 학수고대하였다. 그러므로 기해년의 격돌했던 아픔들을 포용하고 용서함으로써, 비우고 깨트려서 낮은 자세로 맞이하는 새 년의 역사가 출발하기만을~  모두가 자신의 본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여 정도를 지켜냄으로써, 이 혼탁한 지구와 환경이 치유되고 세상이 변화되는 희망찬 경자년이 되기만을~  우리 다함께 빈 잔을 높이 들어 축배를 들어야 할 시점이다. 나름대로 부지런히 달려온 한해의 마지막 매듭을 정성스럽게 풀어주며, 우리 모두는 12월의 축배를 나눔이 마땅하다. (끝)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