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계절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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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계절의 단상
  • 이장열 (사)한국전통문화진흥원 이사장
  • 승인 2019.11.21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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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도 중순을 넘어 한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추수가 끝난 훤한 들판에는 비닐로 짚덤불을 뭉친 새하얀 둥근 원통들만 이방인들처럼 널려있다. 낮에는 나무들이 털어내 쌓인 낙엽들의 와작거리가 소리가 시끄럽더니 저녁에는 갑자기 세찬 바람이 일면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밤새도록 주룩주룩 쏟아졌다. 추위를 다그치는 늦은 가을비는 새벽 동틀 무렵이 되어서야 그쳤다. 마당을 둘러보니 낮에 들떠있던 그 많은 낙엽들이 모두 회초리맞은 개구리처럼 바닥에 납작이 엎드려 찍 소리도 못하고 있다.
 음력 11월은 예부터 ‘동짓달’이라 했다. 동짓달은 동지(冬至)가 있는 달이다. 금년의 동지는 양력 12월 22일이다. 귀신은 붉은 색을 싫어한다고 한다. 벽사와 축귀(逐鬼)의 목적으로 붉은색의 팥죽을 먹게된 기원에 대해서는 중국의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기록이 있다. 하지만 전설이나 신화들은 간혹 사실에 근접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이 허황된 이야기들이어서 깊이 믿을 바는 못된다. 농촌사회에서의 11월은 추수에 일찍 김장마저 끝내고 나면 비로소 몸과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그리고 세모가 가까워지는 이때가 되면 사람들은 자기가 살아온 일생과 금년 1년의 삶을 회고하고 그리운 사람들도 보고 싶어진다. 사람뿐 아니라 뭇 생물들이 생존투쟁과 번식의 소임을 멈추고 겨울채비를 위하여 바위틈이나 땅속으로 들어가 버리기 때문에 온 세상이 쥐죽은 듯 조용한 달이다. 떠들법석한 크리스마스가 있는 12월과 함께 새해맞이의 전야격인 11월은 조용한 죽음과 같은 달이다. 그래서 11월은 일년 내내 번잡하던 일상과는 다른 생소한 계절로 느껴진다. 그런 면에서는 2월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11월과 2월은 색다르고 버림받은 외톨이, 제5계절이다. 2월이 소생을 준비하는 달이라면 11월은 조용히 죽음을 준비하는 달이다. 곧, 살아가는 달과 죽어가는 달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11월은 생명있는 자 모두가 입을 다물어버린 침묵의 달이다. 대자연은 준비단계에서는 극비와 무언으로 일관한다. 그래서 11월과 2월은 유독 조용한 달이다.
 마지막으로 인생의 11월은 가장 쓸쓸한 계절이다. 젊을때 미모로 유흥가를 주름잡던 쭈그러진 퇴기의 달이다. 제자들의 발길마저 끊어진 퇴직교수의 계절이다. 그런 전직 고관의 달이다. 정치인들이 줄이은 방문을 받던 대찰 주지가 이제는 찾는이 없이 뒷방지기가 된 중의 계절이다. 노름으로 유명한 미국 라스 베가스에는 의외로 재벌거지가 많다. 이제는 한끼 먹을 빵을 걱정하는 그들이 죽어도 거기를 떠나지 못하고 쓸쓸히 살아가고 있다. 11월이 그들의 달이다. 조그만 죄인 하나 잡아다 놓고 고함으로 호령하는 일부 경찰, 검찰족들이 맞을 미래의 달이다. 어두움 직전의 11월이 그런 달이다.
 끝으로 11월은 특히 늙은이들에게는 슬픈 계절이다. 왁자지껼 떠들던 애들이 동무를 부르며 허름한 집 방문을 열어본다. 토굴같은 방구석에 웅크린 늙은이가 있다. 아이들은 “아무도 없네”하고 돌쭉문을 덜컹 닫아 버리고 뭐라고 떠들면서 사라져 버린다. 방안에 있는 늙은이는 애들한테까지 사람취급도 못받는 신세가 서러운 것이다. 철썩 닫는 문소리가 서러운 것이다. 그 허전함에 외로움은 더하게 된다. 사람이 늙어지면 마음이 자꾸 달팽이 껍질속으로만 옴추려 들게 된다. 외로운 노인들의 삶, 제5계절이 바로 그들의 계절이다.
 이 세상은 알게 또는 모르게 사필귀정과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제자식 귀한 줄만 알고 제 부모를 천시하는 자식들도 후일에는 역시 귀염둥이 제자식으로부터 똑 같은 대접을 받게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과응보라면 얼마나 무서운 법칙인가? 우리 모두 겸손하게 살아야함을 느끼면서 이 11월에 다시 한번 나의 옷깃을 여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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