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장환의 ‘성씨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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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장환의 ‘성씨보’
  • 최동철
  • 승인 2018.09.13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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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9>

 요즘 주말만 되면 예초기의 굉음이 산중턱 곳곳서 들려온다. 최대 명절인 추석을 앞두고 후손들이 조상의 산소에 예를 표시하는 벌초하는 소리다. 많은 이들이 차례 등을 앞당겨 지내고 정작 한가위 연휴 때는 외유나 취미를 즐기는 게 요즘의 새로운 풍속도다.

 그러나 이러한 시류를 탓할 이유는 없다. 관습이란 결국 그 시대의 세태 흐름에 따라 바뀌는 것이기 때문이다. 법조차도 이에 맞춰 신설되고 개정된다. 거창하게 사모관대를 하거나 ‘어동육서’니 ‘좌포우혜’니 하는 복잡한 차례상차림은 이제 ‘오래된 관습’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됐다.

 조상에 대한 개념도 바뀌고 있다. 시대의 선각자였던 우리 고장 출신 오장환 시인은 이미 일제 치하였던 1936년10월10일자, 조선일보에 ‘성씨보(姓氏譜)’를 통해 이같이 발표했다.

 ‘내 성은 오씨(吳氏). 어째서 오가인지 나는 모른다. 가급적으로 알리워 주는 것은 해주로 이사온 일청인(一淸人)이 조상이라는 가계보의 검은 먹글씨. 옛날은 대국 숭배(大國崇拜)를 유심히는 하고 싶어서, 우리 할아버니는 진실 이가였는지 상놈이었는지 알 수도 없다. 똑똑한 사람들은 항상 가계보를 창작하였고 매매하였다. -(생략)’

 본관이 ‘해주’인 오 시인은 정작 자신이 왜 ‘오가(吳哥)’인지 모른다. 단지 조상 때부터 그렇게 불려 왔기 때문이다. 성씨보, 즉 족보(族譜)를 보면 청나라에서 건너온 이를 조상으로 하고 있지만 그마저도 믿을 수 없다. 족보란 얼마든지 허위로 작성되고 매매될 수 있다고 믿었다.

 실제 일제는 한반도를 강점한 후 호적정리를 했다. 이 과정에서 성씨 없이 ‘갑돌’ ‘갑순’ 등 이름으로만 불리던 양반집 ‘하인’ ‘종’들에게 소속된 집안의 본관과 성을 부여했다. 자연히 ‘종’들을 많이 부렸던 김, 이, 박 등 명문가의 성씨 인구가 가장 많이 늘어난 계기가 됐다.

 많은 이들이 비록 족보는 없으나 호적에는 명문의 본관을 가진 성씨로 등재됐다. 그래서 오 시인의 지적처럼 족보등재를 둘러싼 숱한 잡음이 생겼다. 진위야 어떻든 갖은 방법으로 사고팔던 ‘양반첩’처럼 족보도 그랬다. 오늘날에도 진위를 놓고 족보싸움이 벌어지곤 한다.

 유교적 문화권에 속한 중국이나 일본에도 우리나라처럼 본관을 매우 중요시 하는 관습은 없다. 일본은 출신지를 표현한 성씨로서 가장 많은 성씨를 가진 나라로 꼽힌다. 대규모 부계친족집단이 존재했던 중국에서도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여 살게 된 때는 본관을 바꿨다. 그래서 아주 가까운 조상이 같아도 사는 지역이 다르면 본관이 다를 수 있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후손들이 타지에서 수백 년을 살았다 하더라도 수백 년 전 조상들이 살았던 행정구역명칭 그대로가 본관이다. 경주든, 보은이든, 서울이든 또는 평양이든 오랜 세월 생면부지로 살았어도 예전 같으면 모두 ‘동성동본 불혼’의 혈족인 셈이다.
 성씨보는 나라를 빼앗긴 모든 조상에 대한 부정이자, 자신에 대한 모멸감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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