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은 이렇게 풍성한 계절의 옷을 갈아입는다. 지금 가을을 맞은 농촌에는 노란 물결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수문1리에도 가을이 머물고 있었다. 벼이삭은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양식이 되고 돈이 되고 그 모습 또한 한없이 착하다. 농부들의 솜씨는 올해도 여전했다.
60대 전후의 주민이 반반이라 젊은이들이 많다는 수문1리. 56가구 140여명의 주민들이 솜씨 좋게 마을을 지켜나가고 있었다.
농경지의 대부분이 논이라 벼농사를 많이 짓는다는 이곳은 논이 15만평 규모인 것에 비해 밭은 2만평에 불과하다고 한다.
추수할 때가 점점 다가오고 있는 마을 앞 들녁을 돌아 3년 전 개설된 2차선 도로가 넓게 나 있었다. 길은 외속리면 소재지까지 이어져 있으나 포장은 수문2리를 지나 외속리면 불목리까지만 돼 있다고 한다.
그 길을 따라 마을로 향하는 길에 두리번거리며 마을 유래비를 찾았다. 결국 박명대 이장의 안내로 수문1리 유래비를 볼 수 있었다.
마을 유래비는 2차선 도로가 생기기 전 마을 진입로로 주민들이 이용했던 길옆에 세워져 있었다.
수문1리는 재난지역으로 마을 앞을 흐르는 삼가천에 제방이 높게 쌓여 있다. 또 마을 입구에는 재난지역임을 알리는 표지판에 대피 요령 등을 적어 놓았다.
집집마다 방송시설이 돼 있어 수해의 위험이 있을 경우 군에서 직접 안내 방송을 해준다고 한다.
수문1리 마을봉사자로는 박명대(52) 이장과 최태흥(70) 노인회장, 안정오(65) 부녀회장, 정원기(38) 새마을지도자가 있다.
# 마을 유래
수문1리 마을 뒤로는 속리산 정기를 이어받은 구병산이 펼쳐져 있다.
그 기슭에 원앙골과 사창골이란 곳이 있는데 그곳이 원래 마을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원앙골(절골)은 옛날에 절이 있었는데 거기에 원앙이란 스님이 살았다 해서, 사창골은 전에 사창이 있어 군량미를 임시로 보관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군 지명지에 기록되어 있다.
지금 마을이 형성된 자리는 예전에 냇가가 흐르던 곳이었으며 집이 4가구 정도 있었다고 한다.
산밑으로 냇가가 흘러 마을에 이기소(沼) 함박소(沼) 돌소(沼)라는 물이 휘돌아 흘러 소용돌이가 생기는 소(沼)가 있었다. 이 중 돌소가 변하여 돌쇠라 부르게 된 것이다.
마을 앞 농경지는 미루나무 숲이 있던 곳으로 박명대 이장이 관기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소풍을 온 적도 있다고 했다.
제방이 쌓이고 물길이 바뀌는 등 지형이 많이 변해 그전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그때를 상상할 만한 흔적들은 그래도 남아 있었다.
수령이 200여 년이나 된 느티나무는 그 밑에서 냇물이 沼를 만들며 흘렀는데 나무 아래가 큰 바위라고 한다. 어떻게 바위 위에서 나무가 자랄 수 있었는지 주민들도 신기해했다. 이것뿐 아니라 아직도 남아 있는 냇가 옆 언덕의 나무와 풀이 우거진 그늘 밑에도 바위가 있다고 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정말 바위였다.
# 동제사로 마을 안녕기원
마을을 다니다보면 돌탑이 세워져 있는 것을 자주는 아니어도 간혹 볼 수가 있다.
수문 1리는 지금의 마을 앞과 예전에 마을이 있었다는 원앙골에 오래된 돌탑이 세워져 있다.
높은 곳에서 보면 마을이 들어서 있는 그 일대의 지형이 소가 앉아있는 모습과 흡사하다고 한다. 정설(定說)은 아니지만 마을이 있는 곳은 꼬리 부분으로 자주 움직이는 소의 꼬리를 고정시켜놓기 위해 돌탑을 세워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마을로 들어와 사는 사람들은 큰 어려움 없이 전반적으로 잘 산다고 했다.
수문1리는 음력 2월4일이면 주민들이 모여 마을의 안녕을 기리기 위해 원앙골과 마을 앞 돌탑 두 곳에서 동제사를 지낸다.
원앙골 돌탑은 갈평으로 이어지는 농어촌 도로 공사 때문에 없어질 위기에 처했었으나 주민들의 건의로 선형을 조정해 도로를 돌탑 옆으로 비켜가게 했다고 한다.
조상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풍습이라 계속 이어가고 있다는 수문1리 주민들. 마을의 평안을 바라는 주민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 상조계 성격을 띤 넝쿨계
수문1리에는 상조계의 성격을 띤 넝쿨계가 있다.
회원이 30명으로 출향인도 몇 명 참여하고 있으며 계가 조성된 지 15년 전 정도 되었다고 한다.
마을에 애사가 생기면 상여도 메고 크고 작은 일들을 맡아하는 상조계. 특별히 넝쿨계라고 한 이유를 묻자 넝쿨계 회원으로 젖소 사육을 하는 최상국(48)씨가 처음 의견을 내놓았고 회원들이 모두 찬성을 한 것이라고 한다.
3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이 서로 화합하고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 나가자는 의미가 담긴 '넝쿨'. 처음에는 마을 사람들 위주로 했으나 이제는 출향인들도 참여하고 있다. 많은 출향인들이 참여해 고향의 의미를 삶 속에 더 깊이 새기며 살아가는 계기로 삼으면 어떨까 싶다.
회원들은 여름이면 야유회를 준비해 동네 어른들을 대접한다고 했다.
사람들이 좋고 단합도 잘 돼 오늘날까지 꾸준히 이어져온 넝쿨계. 이들을 감싸고 있는 넝쿨은 어디까지 쭉쭉 뻗어 올라가려나, 한참동안 궁금해졌다.
# 내년 봄에 대추나무로 작목 전환
이미 시작되었다. 농부들이 벼농사를 접고 소득이 될 만한 작목으로 전환을 꾀하고 있다.
벼농사를 많이 짓는 수문1리 주민들도 그대로 있을 수만은 없다.
올해는 대파를 2000평정도 심었으며, 내년 봄에는 논을 밭으로 만들어 대추나무를 1만3000평 심을 계획이라고 한다. 그리고 대추나무 사이에 키가 작은 대파를 심어 소득을 높일 생각이다. 내년에 대추나무를 심고 그 후에 또 무언가를 경작하더라도 그것이 주민들에게 부농을 꿈꾸는 희망의 열매가 돼주길 기대한다.
박명대 이장은 "농사짓는 사람은 장사꾼이 돼야 한다"고 했다. 지금은 농사를 잘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은 가격에 잘 팔 수 있는 판로를 찾아내고 시세에 따라 그때그때 적당한 조치를 취하는 현명한 장사꾼 농부가 살아 남는 시절이다.
팔 것이 많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수문1리 주민들의 바람이다. 젖소, 양돈, 버섯 재배 농가도 있지만 소득작물이 벼밖에 없어 돈 쓰기가 맑다고 한다.
훗날 팔 것이 많아지면 주민들은 장사꾼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속 썩는 일도 없고 포기하는 일도 없을 테니까.
수문1리 숙원 사업은 마을 회관 건립이다. 현재 새로 지은 경로당을 마을회관으로 같이 사용하고 있었다. 경로당 옆에 부지가 있긴 하지만 예산이 없어 못 짓고 있다고 한다.
공사비를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아직은 엄두를 못내는 실정이다.
마을에서 큰 일을 치를 때 여러 용도로 활용할 수 있는 마을 회관 마련은 수문1리만의 숙원은 아닐 것이다.
마을 뒤로 펼쳐진 구병산의 전경은 히말라야산맥이 아주 조금만 부럽고, 마을 앞을 물들인 황금빛 들녘은 어느 것 하나 부러울 것이 없다.
찰칵! 어디선가 사진기 셔터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아빠는 황금빛 들녘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는 아내와 아이의 사진 속에 농부들의 가을을 담아가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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