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대를 잇는 업소-동방철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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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대를 잇는 업소-동방철공소
  • 송진선
  • 승인 2006.08.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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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60년간 농민과 함께 해
철공소. 말 그대로 철을 가지고 공작하는 곳이니 바로 철로 물건을 만드는 곳이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옛날에나 있을 법한 이름이다. 철공소는 지금으로 치면 공업사나 농기계 정비소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신식으로 철공소 간판을 내리고 무슨 공업사 또는 무슨 카센터, 무슨 농기계 수리센터 등과 같은 간판을 내건다.

그래도 대를 잇는 업소에 당당히 철공소 간판을 내걸고 꾸준히 영업을 하고 있는 곳을 찾아냈다.  보은읍 삼산리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동방철공소다. 정말 대를 잇는 업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옛날 모습이다.

# 폭염에 철공소 기계도 쉬어
동방 철공소를 찾은 날은 바람조차도 폭염에 기가 꺾였던 날이었다. 계속되는 폭염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고 겉옷까지 배일 정도로 등줄기에서는 땀이 연신 흘러내렸다.

아니나 다를까 폭염에 철공소 기계도 낮잠을 자듯이 한 숨을 고르고 장세인(48) 사장은 더운 바람을 일으키는 선풍기를 쐬며 땀을 식히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철근 자르는 소리, 철근 두드리는 소리 등등 현장의 소리들로 가득 찼을 것이다.

철을 다루는 공작소 아니랄까봐 철공소 앞 마당에는 보통사람들의 눈에는 고물처럼 보이는 폐철 같은 것들이 쌓여있다.

고철로 팔아버리면 돈이 되겠다 싶은 생각에 문의를 하니 장세인 사장은 남들 눈에는 고물 같이 보이지만 다 쓸데가 있다며 소중한 자재란다. 하지만 기자 눈에는 영락없는 고철더미에 불과했다.

# 3형제가 얼마전 분가
동방철공소는 3형제가 하던 철공소로도 유명한 곳이다. 현재 장세인 사장은 큰형인 장세훈씨(52)와 막내 동생인 장세홍씨(45. 보은 삼산)와 함께 한 지붕 밑에서 살며 동방철공소라는 한 직장에서 일했다.

장세인 사장은 큰 형이 기계를 보면 응용할 줄 알고 또 기억력이 좋다고 평했다. 그래서 한 번 보면 어떤 곳을 고쳐야 하고 어디를 어떻게 고치면 좀더 편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등등을 알아낸다는 것.

막내 동생은 학창시절 축구를 해 운동신경이 좋고 뚝심이 강하고 기동력이 좋아 대응력이 좋다고 평했으며 자신은 기계를 보면 깊이 있게 보려고 노력하고 수리가 들어오면 응용을 해서 농민들이 사용하기가 더 편한 쪽으로 개선시켜 준다고 한다.

그래서 3형제가 함께 했을 때는 손발이 척척 맞아 일도 빨리 끝내 일의 성과도 높이고 농민들이 만족도도 높였다는 것.

그러다 점차 농기계 수리점도 많이 생기고 맞춤형 부품으로 인해 대리점을 통한 수리가 일반화 돼 일거리가 점차 줄어들어 큰형과 막내 동생은 축사 건축 일을 하는 것으로 분가하고 가업은 장세인 사장이 잇게 된 것이다.

장세인 사장의 손재주는 일제 때 만주에서 살다가 1945년 해방이 돼서 고향으로 돌아와 1946년 신흥공작소라고 동생과 함께 보은에 처음 문을 열었던 아버지 고 장규석(95년 3월 작고)씨를 닮았다.

당시는 발동기도 없어 하늘만 바라봤던 시절이다. 그나마 발동기가 있으면 다행인 때 농기계도 없고 농기계 부품이라고 해봐야 지금과 같이 정형화되지 않아 배터리를 직접 만들어 달았고 발동기 부품을 일일이 손으로 가공해서 달았던 때였다.

신흥공작소(후에 동방철공소로 전환)는 발동기 수리는 물론 자동차 배터리도 일일이 제조해 달았고 부품도 가공해서 자동차가 굴러가게 만들었다.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기계는 있지만 전부 수동이었다. 당연히 기계를 잘 고치는 사람이 필요했다.

하지만 자동차 산업의 발전으로 점차 배터리는 물론 각종 부품도 기계로 찍어내 부품을 직접 만들었던 동방철공소의 역할이 줄어들게 된 것이다.

결국 동방철공소 작업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자동차 정비는 그만 뒀다. 그리고 완전히 농기계 제조 정비 분야로 전환했다.

# 14살 때부터 일 시작
아버지가 배터리를 직접 제작하는 것을 보고자란 장세인 사장은 중학교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철공소 업무에 관여했다.

큰 형은 물론이었고 자신보다 3살 어린 막내 동생도 물론이었다. 손재주가 아니라 장인정신이라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능력이 뛰어난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직접 배터리 만드는 것을 가르쳤고 발동기 고치는 것을 가르쳤고 탈곡기, 탈맥기 만드는 것을 가르쳤다.

장세인 사장은 나중에 직접 철공소에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재미는 있었다. 그래서 농사일손을 돕는 것처럼 학교가 파하면 철공소에서 아버지 잔심부름도 하며 어깨 너머로 아버지의 손놀림을 눈여겨봤다.

콤바인이 없었던 때 보리타작과 벼 타작을 했던 탈맥기와 탈곡기를 장세인 사장이 14살 때 이미 제작했을 정도로 눈썰미와 손재주가 대단했다.

한 집에서 구입하기가 벅차 동네에서 몇 집이 어울려 기계 한 대를 구입해 각 마을을 다니며 타작을 해주고 수곡을 받는 형태로 벼를 탈곡했었다.

69년, 72년 무렵이다. 당시 탈곡기 가격이 8만원, 중학교 수업료가 3만원이 채 안됐을 때다. 중학교 때부터 이미 정세인 사장은 될성부른 떡잎이었던 셈이다.

고등학교 진학 무렵 아버지와 함께 철공소를 운영했던 큰형이 군대를 가면서 아버지와 손발이 맞는 사람이 없자 장세인 사장은 고교 진학을 1년 뒤로 미루고 철공소 경영 일선에 뛰어들어 아버지 일을 도울 정도였다.

큰형은 보은농고를 나와 철공소에서 일을 했지만 자신은 대학을 진학하겠다는 생각이 컸기 때문에 1년 후 인문계인 보은 고등학교를 진학했다.   당시에는 일거리가 많았기 때문에 아버지와 큰형 일손만으로는 부족해 장세인 사장은 공부를 하면서도 철공소 일도 열심히 했다.

수한면 동정저수지를 축조할 때는 중장비 수리 요청이 들어오면 출장을 나가 새벽 1, 2시에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코피를 쏟아가며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를 했지만 공부만 했던 친구들에게 당연히 학업 성적은 뒤졌다.

결국 대학진학은 포기하고 큰형과 함께 동방철공소 가업을 잇게 됐다. 축구를 하던 동생도 자연스럽게 가업을 승계하는 등 3형제 동업자가 됐다.

# 후계자 없어 안타까워
1946년 보은읍 삼산리 89-2번지에 흙벽돌 함석지붕으로 처음 시작한 동방철공소는 80년 수해를 당해 82년 현재의 건물로 신축됐다.

60년 역사의 철공소, 건물은 24년 됐지만 60년 역사를 유추해볼 수 있을 정도다. 그 하나가 바로 전화번호이다. 면 단위에서는 전화가 없을 때 읍 전화번호는 2국이었다. 동방철공소는 그것만으로도 골동품이다.

이외에 철공소 안에는 골동품이 더 많다. 쇠를 자르는 선반의 나이는 대전에서 중고를 들여왔는데 지금은 대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란다.

그런가 하면 공구함은 장세인 사장이 직접 캐비넷 형으로 제작했는데 그 모습이 일품이다. 쇠에 구멍을 뚫는 드릴도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쇠 천지인 철공소 안에는 이름도 알 수 없고 용도도 알 수 없는 공구들이 많다.

장세인 사장이 없어도 주문자가 요구하는 부품들을 팔 수 있을 정도로 각종 부품들을 정리해놓았다. 경운기 피대도 크기별로 정리했다.

어수선해 보이지만 나름대로 찾기 쉽게 정리된 60년 역사를 읽을 수 있다.

군대 3년을 제외하고 보은에서 나고 자란 보은 토박이인 장세인 사장은 요즘 고민이 생겼다.

60년 전통의 동방철공소를 승계할 후계자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자처럼 기계로 찍어낸 부품들이 일반화돼 철공소를 찾는 발길이 줄어들었고 자연히 돈벌이가 시원치 않아 선뜻 해보겠다고 하는 자식이 없다.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는 아들에게 가끔 철공소 역사 및 가업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 중이다. 그러나 부인 서충순씨의 생각도 다르고 아들 생각도 아직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고민은 더욱 깊다.

우선 아들이 전공과목을 열심히 공부하고 또 고등학교 1학년인 딸도 열심히 공부해 바라는 대로 잘 풀리기를 희망할 뿐이라고 장세인 사장은 말했다.

고장난 농기계를 고쳐 농민들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하는 60년 역사의 동방철공소를 가업으로 승계해 2대에 그치지 않고 누대로 이어져 지역의 명물로 거듭나길 취재하는 내내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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