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음력 시월 보름께면 중학생이던 나는 늘 고향 마을 이곳저곳에서 묘제(墓祭)로 지내던 시향제에 참석하였다. 그때는 너무 추워서 할머니는 내게 두꺼운 내복을 두세 벌씩 껴입히셨다. 산수리 바로 앞쪽에 깨끗한 금강 물줄기가 굽이쳐 흘렀는데, 이때쯤 되면 강물이 꽝꽝 얼어붙었다. 인절미용 찹쌀밥 찧는 떡메를 울러 멘 친척 아저씨들을 따라다니며 모래무지와 가물치를 건져 올렸다. 얼음짱 밑으로 물고기가 지나가면 이를 조준해서 떡메를 내리치면 얼음 깨지는 소리가 쩡쩡 울렸다. 물고기는 기절해서 잠시 강바닥에 널브러진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얼음 구멍을 내고 긴 대꼬챙이로 물고기를 찍어 올렸다. 올 시향제 때는 유난히 날씨가 따뜻했다. 그때와 지금 기온은 얼마나 차이가 날까.
앞산 너머 매산리에 300평 남짓한 밭이 있다. ‘손이 덜 간다’고 해서 왕감나무를 심었는데, 토질이 박하여 감이 많이 열리지 않는다. 죽은 감나무 대신 몇 그루 밤나무를 심었더니, 제법 유실수 구실을 해서 위안이 되고 있다. 지난여름 거의 두 달 동안이나 예년보다 기온이 높았고 비도 많이 내렸다. 일주일에 최소 한 번씩은 우리 밭 경계로 넘어온 칡넝쿨을 걷어내고 감나무 가깝게 웃자란 잡초를 베어내었다. 8월 말부터 추석 전까지 20일 동안 집을 비웠다가 매산리 밭을 방문했더니, 칡넝쿨, 환삼덩굴에 이어 가시박에 단풍잎돼지풀까지 왕감나무를 뒤덮고 있었다. 한두 해도 아니고 벌써 십 년도 넘게 예초기 둘러메고 드나들던 밭인데, 생태계교란종 야생식물들의 총공세가 야기한 올해의 변화는 너무도 놀라웠다.
더 놀랄 일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지난봄부터 사당 후원 대나무에 꽃이 피더니 대나무숲 전체가 서서히 고사(枯死)하였다. 대나무의 한 바퀴 주기(週期)가 도래한 것으로 이해했다. 5월로 접어들면서부터 비바람에 꺾이고 넘어진 것을 하루에 몇 개씩 베어냈다. 점차로 대숲이 옛날에 할머니가 가꾸시던 닥밭으로 변모하였다. 한지(韓紙) 원료인 닥나무가 대나무보다 먼저 터전을 잡아 온 곳이었다. 매산리 밭처럼 20여 일 만에 올라갔다가 깜짝 놀랐다. 봄이 한창인 4월 5월에 잎이 나고 동시에 꽃이 피어 1.5미터가량 자라는 자리공이 철지난 가을에 그것도 한 달여 사이에 닥밭을 점령하고 있는 게 아닌가. 듬성듬성 피어난 것도 아니고 물결치듯 닥밭을 완전히 뒤덮고 있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자리공을 베어내려고 다시 닥밭에 올랐을 때, 거기에 또 처음 보는 새로운 자연현상이 버티고 있었다. 대나무 순이 여느 잡초처럼 솟아나고 있었다. 대나무는 봄비와 함께 죽순으로 태어난다. 세상에 나오는 죽순 굵기 그대로 죽순에 응축된 마디 수 그대로 한 해 동안에 다 자란다. 키가 더 자라지도 줄지도 않으면서 일 년 내내 청청한 것이 대나무다. 그런데 닥밭에 등장한 대나무는 지난 십여 년 동안 본 적이 없는 모양새였다. 대나무 잘라낸 근처의 뿌리에서 여러 갈래가 한꺼번에 분수처럼 솟아오른 형태다. 돌연변이일까. 아니다. 그러고 보니 동남아 더운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대한 대숲의 축소형이었다. 그곳에서는 죽순이 독립적으로 곧게 자라 오르지 않고, 한 무더기에서 거대한 분수처럼 솟구쳐 오른다.
지난여름 날씨를 되짚어 보았다. 여름철 6월에서 8월까지의 전국 평균기온이 25.6도였다. 평년 치 23.7도보다 1.9도가 높았는데 1973년 이래 50년 만의 최고 기록이었다. 저녁 6시부터 다음 날 아침 9시까지의 최저온도가 25도 이상인 열대야(熱帶夜)가 전국적으로 20.2일로 기록되었다. 평년 치는 6.5일이었으므로 평년 대비 3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서울의 열대야는 39일 동안 지속되었는데, 그것도 34일은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33도 이상인 폭염도 24일간이나 내려 쬐였고, 일 년 내내 내릴 강수량의 80퍼센트가 6월과 7월 장마철 두 달에 집중적으로 쏟아져 내렸다. 한반도가 빠르게 아열대권으로 변모해 가고 있는가.
삐삣(pipit)이라는 새가 있다. 동남아에 가면 어디서든지 볼 수 있는 새다. 우리나라 참새와 비슷한데, 참새보다 약간 작고 검은 색깔을 띠는데 가슴에 흰색 털이 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몇 해 전부터 산수리에서도 삐삣새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참새는 교회새라고 하고, 삐삣은 숲 새라고 하는데, 사는 데에 따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 산수리에 논이 없어서일까. 참새는 많이 줄어든 것 같고, 그 대신 삐삣새가 자주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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