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심사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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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심사의 가을
  • 오계자(보은예총 회장)
  • 승인 2023.11.02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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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나무 이파리가 백일 맞은 아가의 피부처럼 상기된 얼굴로 계곡을 밝힌다.
붉음 속에 깔린 노란기운은 푹신한 느낌마저 돈다. 참 곱다. 서둘러 벗어버린 맨몸의 큰 나무둥지들은 미끈한 육체미를 자랑하기도 한다.
이미 불타버린 백제 혜감국사의 자취는 주춧돌만 남았다지만 혼을 쏟아서 깎고 다듬어 중건한 조선의 도편수들을 상상하며 한발 한발 된비알을 올랐다.
역시, 象王山開心寺 편액이 걸려있는 겹처마에 팔작지붕의 루가 귀티 난다. 미리 답사 자료를 보았으니 안양루라는 것을 짐잠했다. 힘들어도 올라오길 잘했구나 싶다. 한자를 그대로 보면 코끼리의 왕이라고 해석되는 象王山상왕산은 부처님을 상장한단다. 코끼리를 위해 만들었다는 직각연못에 외나무다리가 놓여있다. 그 다리를 건너는 친구는 찰칵 추억으로 담았다. 고고학 강의를 듣다보면 우리 땅에 코끼리의 흔적을 많이 보고 듣는다. 한반도가 아열대 지역이었다는 설의 증빙자료가 된다.
안양루 옆 해탈문으로 들어가다가 나도 모르게 그만 멈춰섰다.
공토에 흐르는 바람처럼 허허롭고, 헐렁하게 입은 바짓가랑이 속으로 쓸쓸한 기운이 스며들어 소름이 돋는다. 북적거리던 손님들 배웅하고 돌아서서, 거실에 무질서하게 어질러진 상황을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헙헙하다.
어인 일인가. 여느 집 창고처럼 썰렁하고 산지사방 먼지 쌓인 안양루 내부의 허접스러움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안양’이란 곧 극락을 말함이란다. 너무 기대를 한 탓도 부인할 수는 없다. 불교 의식에 소중하게 쓰이는 법고와 목어, 운판 등이 보관 되어 있고 벽에는 석가모니의 전생 이야기라는 본생담을 주제로 한 귀한 그림이 그려져 있지만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미리 공부하면서 분노를 느꼈던 범종각으로 향했다. 소나무의 구부러진 모양을 그대로 살린 기둥이 오히려 아름다워 보인다. 사연이 깊은 범종은 일본강점기 때 귀한 문화재를 쇠붙이라고 약탈해갔음을 참회 하겠다며 어느 일본인이 설판 시주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끼고, 큰 시주를 하신 그분은 진정한 애국인이다. 
대웅전으로 가보았다. 대웅보전 편액이 걸려있다. 대웅전이라면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양쪽 옆 협시보살을 모신 법당이다. 협시로 아미타불 또는 비로자나불 들을 모시게 되면 한층 격을 높여 대웅보전이라 한다.
“협시는 보살인데 왜 대웅보전인가요?” 해설사에게 물었다. 부처님을 잃어버려서 다른 절에서 모셔오고 편액은 그냥 둔 탓이란다.
물 한 모금 마시고 가슴을 여미며 아미타불 좌상 옆에 모셔진 입상협시보살을 보자. 가슴에 파문이 일었다. 본디 네 자리 내자리가 어디 있을까만, 좌상의 본존과 높이를 맞추려고 빌린 자리처럼 어색하게 천년의 세월을 저렇게 서 계셨다.
그렇다. 물이 맑아야 물속을 볼 수 있는 법, 내 하찮은 상식이 마음을 흐려 놓았다.
愚眼으로 먼지만 보았으니 허접스러운 것은 안양루 내부가 아니라 바로 내 마음이었다. 어리석음의 격량을 재빠르게 가라앉히고 길게 숨을 쉬었다.
유난히 수난을 많이 겪었던 한반도, 이래저래 조상의 숨결인 문화재를 도둑맞거나 빼앗기다가 조정의 억불정책으로 사찰들을 불태웠다. 外侵이 아닌 우리의 부끄러운 왕조와 선조들이 말이다. 잠시지만 내 알음알이를 앞세운 것이 부끄럽다. 
탑을 내려다보니, 심검당과 명부전이 엄마 품처럼 오측석탑을 안온하게 감싸 안고 있다. 기단에는 伏蓮이 새겨져 있고 옥석도 갖춘 귀공자다.
현대인들도 따르기 어려우며 건축예술의 극치라는 대웅전의 옆모습을 바라보니 상처투성이 천년의 세월이 건 듯 바람처럼 한줄기 스친다. 역사와 문화재 공부를 하면서 우리의 조상이 얼마나 현명하셨는지 진심으로 존경하고 감사하다. 소수의 세속 인간으로 인해 흐려진 부분도 있지만 이제는 부디 세속의 바람은 세속에서만 부소서. 마음으로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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