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最古)의 한글편지 쓴 ‘나신걸 묘역’ 보은에 모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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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最古)의 한글편지 쓴 ‘나신걸 묘역’ 보은에 모셔
  • 나기홍 기자
  • 승인 2023.05.11 09: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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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나씨 자손들, 보은 찾아 보물지정 기념 고유제 올려

 

보물로 지정된 나신걸의 한글 편지.
보물로 지정된 나신걸의 한글 편지.

 

  최초의 한글편지 발견 및 보물지정

 현존하는 최초의 한글편지를 쓴 나신걸(1461~1524) 사마참봉(司馬參奉) 자손과 안정나씨 대종회가 지난 9일 탄부면 매화리 묘역에서 ‘나신걸 한글편지 보물지정기념 고유제’를 올렸다.
 안종나씨대종회와 회덕파˙참봉공회가 주최˙주관하고 동양일보가 후원한 이날 고유제에는 나신걸 참봉의 직계손인 나기용 회장과 나정수 안정나씨 대종회장, 나경찬 안정나씨 대종회 사무국장을 비롯한 안정나씨 종친, 조철호 동양일보 회장 및 관계자 등 120여명이 참여해 고유제를 올리고 보물지정을 기념했다. 
  한글편지가 발견된 나신걸의 묘는 2011년 5월까지 대전시 유성구 금고동 안정나씨 회덕파 종중 묘역에 모셔져 있었다.
 이를 대전시의 쓰레기매립장 계획에 따라 14기의 묘지를 이전하게 됐고 그 과정에서 2011년 5월 3일 미라 상태의 묘 4기가 발견됐고, 이곳에서 전통 복식 등 무려 356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그중 나신걸 참봉공의 부인 신창맹씨(온양댁)의 묘에서 41점의 유물과 함께 피상자의 머리맡에 여러번 접힌 상태의 한글편지 2장이 발견됐다.
그것이 나신걸의 한글편지다.
 이 편지는 지금으로부터 530여년 전인 조선초기(1490년경) 지금의 함경도인 영안도에서 군관으로 재직하고 있던 나신걸이 부인 신창 맹씨(온양댁)에게 보낸 것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한글편지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나신걸 하급군관이 한글로 편지를 썼다는 것은 한글이 반포되면서 남녀 모두가 일상적으로 한글을 썼다는 것을 증명하는 역사적인 기록이다.
 안정나씨 회덕파종중에서는 이때 출토된 복식은 부산대학교 한국전통복식연구소에서, 한글편지는 국가기록원에서 각각 수습해 보존처리 과정을 거쳐 나대찬(안정나씨 문중) 명의로 대전시립박물관에 기증했다.
 대전시립박물관에서는 2016년 4월 29일~ 9월 18일까지 ‘그리움을 깁고 연정을 짓다’라는 이름으로 <대전 안정나씨 묘 출토복식 특별전>을 개최했고, 대전광역시장은 한걸음 더 나아가 ‘나신걸 한글편지’를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해 줄 것을 신청했다.
 문화재청에서는 3년여의 조사와 고증을 통해 그 가치를 인정하고 2022년 12월 29일 보물로 지정예고 했으며 2개월전인 23년 3월 9일 문화재보호법 제26종 따라 <나신걸 한글편지>를 보물명으로 보물로 지정했다.

나신걸 편지뭉치.
나신걸 편지뭉치.
나신걸 부인 의류.
나신걸 부인 의류.

 편지에 적신 섬세한 존중과 사랑

 1490년 경 영안도(永安道, 함경도의 옛 이름) 군관으로 있던 나신걸이 고향인 대전에 있는  부인에게 보낸 편지 초입에는 “회덕 온양댁 보시오. 그지없이 수없이 안부를 전하오. 집에가서 어머니도 반갑게 만나 뵙고, 아이도 보고 가고 싶었는데, 장군께서 혼자 가시며 나는 남아 있으라 하니 갈 수가 없소. 이런 안타깝고 서러운 일이 어디 있겠소만, 한번 군관에 추천되면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법이오. 가지 말라고 하는 명을 어기고 가면, 병조에서 회덕골로 문서를 보내 수소문하여 잡아다 귀양을 보낼 터이니, 딱한 노릇 아니겠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서, 영안도(현 함경도)근방 경성(境城)군관으로 가게 되었으니 그리 아시오”라고 쓰며 집에 한 번 가지 못하는 안타까운 입장을 아내에게 호소했다. 

또, 부인의 고통을 덜어 주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이 담겨있다.
이어진 편지에는 “논밭에 나오는 온갖 세납은 형님께 드려서, 형님이 세납에 대해 내 달라고 말씀하소. 공세(貢稅)는 박충의 댁에 가서 미리 알아드었다가 공세를 미리 준비해 놓으시오. 쌀 찧어다가 두소. 또 골에서 오는 면역은 걷어 모아 채집하여 주니까. 완완히 가을에 덩시리에게 자세히 차려서 받아 재역을 치라 하소. 또 녹송이야 슬기로우니  녹송이에게 물어보아 저라고 답하거든 재역을 녹송이에게 맡아서 치라 하소. 녹송이가 저라고 답하거든 골에가서 뛰어다녀 보라하소. 곡식담당 관리에게 많이 달라고 하소연하여 청하라 하소. 또 논밭은 다 소작(小作)주고 농사짓지 마소.”라며 똑똑한 어린 일꾼에게 잡일을 시키고 일도 하지 말고 농사거리를 소작주라는 애정이 가득 담겨 있다.
 필요한 것도 요구했다.
 내달 열흘께 (구다를 통해) 내 삼베 철릭(전투복)이랑 모시 철릭 중 성한 것으로 가리어 다 보내소. 그리고 바늘 여섯을 사서 보내게. 집에 못 다녀가니 이런 민망한 일이 어디에 있을꼬. 울고 가네. 어머니와 아기를 모시고 다 잘 계시소. 내년 가을에 나오고자 하네. 내년 가을에는 갈 것 것 같소.”라고 분과 바늘이 필요함을 요구하며 가을에 만날 것도 기약했다.
이 편지는 기존에 최초의 한글편지로 알려진 순천 김씨 묘 출토 편지보다 50년이 앞선 편지로,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반포(1446년)후  불과 50여 년 만에 한글이 남녀 백성 누구나 일상에서 사용하는 글이 되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이 편지가 무관 출신 나신걸의 부인인 신창맹씨 묘, 피장자의 머리맡에 놓여있었고, 2장의 편지가 여러번 접힌 상태로 출토된 것을 볼때 아내는 남편의 편지를 죽는 순간까지 고이 간직했던 듯 하다.

 
 반포 50여년만에 대중 깊이 한글 보급 확인

 학자들은 ‘나신걸 편지’가 15세기 현전(現傳)하는 최초의 한글편지란 점뿐만 아니라 다양한 측면에서 문화재로서의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먼저, 국어사 측면에서 중요하다. 훈민정음 창제 후 한글을 대중에게 얼마나 보급되었는지 여부를 관官에서 간행된 한글 문헌으로 확인할 수 없었는데 나신걸 편지를 통해 반포 50여 년만에 대중에게 깊숙하게 보급된 사실을 알 수 있다는 견해다.
 또한, 15세기 당시 한국어 구어(말)와 문어(글)의 차이를 구명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해당 편지는 문법 기제의 발달이 구어에서 시작해서 문어로 전이되는 현상을 알려주는 자료로 인정한다.
 나신걸의 편지는 일부지만 중철표기(연철과 분철이 함께 나타나는 표기법)을 보여준다. 연철은 ‘이어적기’라고 하여 15세기~16세기 한글을 소리나는 대로 적은 표음적 표기를 말하며, 분철은 ‘끊어적기’라고 하여 어법에 맞게 각각 음절이나 성분 단위로 밝혀 적는 것인데 지금 우리가 쓰는 글이 끊어적기가 이를 입증한다.
 학자들은 문법 ‘하소체’ 종결어미를 사용하는데 남편이 아내에게 편지를 보낼 때 쓰는 전형적인 표현으로 하소체 사용시기를 15세기 말로 끌어올렸다.
 한편, 남성이 일상에서 능숙하게 한글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대체로 한글 창제 및 반포 후 한글이 여성 전유물이었던 것으로 판단해 왔는데 유일한 15세기 한글편지의 작성자가 남성이란 점은 한글 연구에 새로운 과제를 던져준다.
 문화재청은 한글서예사 측면에서 이 편지가 훈민정음 반포 이후 한글로 필사한 편지 연구의 시발점이 되는 자료면서, 한글 서예의 서체 변천에 대한 연구와 서체의 발전 과정 연구에 이정표가 된다고 평했다.
 나신걸 한글편지의 서체는 꾸밈없이 수수하고 예스럽고 소박하다. 아내에게 진솔한 심정을 표현한 편지에서 당시 백성의 삶과 가정 경영의 실태, 농경문화, 여성들의 생활, 복식 문화, 장묘문화 등을 파악할 수 있다는 면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나대찬 전교(사진 오른쪽 첫 번째)가 안종나씨 대종회 나정수(온쪽 첫 번째)회장과 함께 경과보고를 듣고있다.
나대찬 전교(사진 오른쪽 첫 번째)가 안종나씨 대종회 나정수(온쪽 첫 번째)회장과 함께 경과보고를 듣고있다.


 최초의 한글편지 발굴은 나대찬 전교의 치적

 현존하는 최초, 최고의 한글편지 ‘나실걸 편지’가 발견되어 국가보물로 지정되기까지에는 평생을 보은발전에 앞장서온 나대찬 전)보은향교 전교 노력의 결과다.
 당시 안정나씨 회덕파 고문으로 활동하던 나대찬 전교는 종중소유 3.6ha의 임야를 대전시의 요청에 따라 대전시에 넘기고 산소를 이장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산소와 관계된 종친들에게 통보했다.
 성급한 종친은 자신의 조부모 묘를 파묘해 이장했고, 이 과정에서 나오는 물품의 소중함을 모르고 불태우는 우를 범한 이도 있었다.
 묘지 이전을 시작하자마자 무덤에서는 유물이 나타났고 그 값어치를 직시한 나대찬 전교는 종중의 의견을 모아 17기의 봉분을 대전선사박물관에 발굴 의뢰했고, 이 과정에서 도자기, 토기, 옷 등 무려 15종 55점의 유물이 발견됐고 그중 이번에 국가보물로 지정된 한글편지가 발견된 것.
 나대찬 전교는 종중의 뜻을 모아 15종 55점의 유물을 2011년 5월, 대전선사박물관에 기증했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나신걸 편지’가 국가 보물로 지정되는 결과를 도출했다.
 나 전교는 이에 머물지 않고 대전 종중의 무덤지를 보은군 탄부면 매화리 산12-1에 마련해 묘지를 조성하고 최초의 한글편지를 남긴 ‘나신걸’ 부부를 비롯한 22기의 묘를 이장해 공원으로 조성했다.
이는 한글을 연구하는 이들이 즐겨찾는 새로운 보은의 명소를 떠오를 것이 분명하다.
현존하는 최초의 한글편지를 쓴 나신걸 군관이 이제는 보은에 잠들어 있다.

안종나씨 대종회 및 참봉공파 후손들이 한글편지 보물지정 기념 고유제를 올리고 있다.
안정나씨 대종회 및 참봉공파 후손들이 한글편지 보물지정 기념 고유제를 올리고 있다.
참봉공 나씨 종중.
참봉공 나씨 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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