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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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에 부쳐
  • 최동철
  • 승인 2023.05.11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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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5월11일)은 ‘동학농민혁명’을 기리는 국가기념일이다. 지금으로부터 129년 전인 1894년, 녹두장군 전봉준도 참가한 동학농민군이 첫 ‘황토재 전투’(전북 정읍시)에서 전승한 날을 법정기념일로 2019년 정했다.

 동학농민혁명은 한때 정권을 탈취한 이들의 정치적 활용으로 논란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이를테면 1963년10월3일 개천절에 당시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이 동학혁명기념탑 제막식에 참석했다. 그가 출마한 제5대 대통령 선거일을 불과 12일 앞둔 시점이었다.

 그는 이날 "동학혁명은 부패와 당파 싸움, 그리고 사대주의에 물든 탐관오리들의 도약에 항거한 최초의 대규모 서민혁명으로서 정신은 길이 계승되어야한다"고 말하며 "5.16 혁명도 이념면으로 동학혁명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1980년대 들어 황토현 전적지 등 동학 사적지를 정비하는 사업이 대규모로 행해졌다. 전두환 대통령이 전봉준과 같은 전씨라는 이유로 강력하게 추진했다고 한다. 5.18민주화운동을 야기하고 탄압해 집권한 인물이 민중 항쟁을 기념하였으니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다.

 어쨌거나 박근혜 대통령 재임 때인 2015년12월31일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시행령이 최종 공포되어 ‘동학농민혁명’은 국가가 공인한 명칭이 됐다. 그리고 2019년 문재인 대통령 때, 기념일로 제정됐다.

 각설하고,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 다소의 논란 속에 5월11일로 정해졌지만, 보은군에서는 매년 4월 중순경을 보은동학농민혁명군 위령제를 겸한 보은동학제 행사를 치른다. 왜냐면 동학농민혁명의 시작과 끝이 결국 보은군에서 비롯됐다 여기기에 그렇다.

 동학농민혁명군이 첫 ‘황토재 전투’를 치르기 일 년 전, 1893년에 보은 장내리에서 동학 보은취회가 열렸다. 취회(聚會)는 모이고 흩어짐이 자유로운 모임이라는 뜻이다. 동학교주 최시형을 비롯해 김구, 손병희, 전봉준 등 전국 8도 각지에서 2만3천여 명이 집결했다.

 애초엔 교조 최제우의 명예회복이 목적이었다. 허나 진행되던 과정에서 정치적 운동으로 변모했다. 농민·상놈으로 천대받던 이들과 결합되며 나아가 보국안민·척양척왜를 기치로 내걸게 됐다. 따라서 당시 보은집회는 큰 성과 없이 끝났지만 이듬해 동학농민혁명의 모태가 됐다.

 즉, 일제의 만행에 분노한 동학농민혁명군이 1894년 전국적으로 봉기했다. 하지만 병장기의 질과 숫자가 턱없이 역부족했다. 전봉준 장군의 동학농민군이 우금치 전투에서 대패했다. 그해 겨울 패퇴한 2500여 동학농민혁명군도 마지막 전투지 속리산 주변에서 몰살당했다.

 7년 후, 1901년 보은동학포주 송팔룡에 사형이 집행됐다. 1910년8월29일 국치일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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