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의 자랑, 애국지사 어윤석,어경선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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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의 자랑, 애국지사 어윤석,어경선 선생
  • 박진수 기자
  • 승인 2023.03.02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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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조선사회는 어느 시대에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제국주의 세력의 정치, 경제적 침략으로 큰 위기에 처했던 시기였다. 또한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조선의 지식인들은 오랜동안 중화사상의 울타리 안에서 살다가 갑자기 서구의 물질문명과 이질적인 문화와 사상을 접하면서 급격한 혼란을 겪게 되었다. 
이 무렵 어윤석 선생은 아들 어경선, 어중선 형제를 데리고 평소 존경하던 동문(同門) 사우(士友)인 의암(毅菴) 류인석(柳麟錫) 선생이 강학을 하고 있던 제천으로 달려가 창의(倡義)할 것을 여러 사우들과 함께 주창(主唱)하였다. 
이때 심재 선생은 격문(檄文)에 “나라를 사랑하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의거에 누가 창의하지 않으며, 원수를 갚고 형세(形勢)를 보존하는 일에 누가 거사(擧事)하지 않겠는가. 오늘에 일을 차마 어찌 말로다 하랴. 일을 하는데 우리는 죽지 않으면 그만이고, 죽는다 해도 대의를 펴서 천하를 구하기 위해 죽으니 죽을 명분을 찾은 것이다. 
어윤석 선생 부자(父子)는 호좌의진(의암 류인석 의병부대)에서 중무장한 일본 수비대 3개 중대와 18일간 수성전(守城戰)을 펼쳤던 충주성전투를 비롯해서 수안보 전투, 제천의 낭산전투 등 여러 전장을 의암 류인석 의병장과 함께하며 많은 고초를 겪었다. 
의암 의병장 휘하의 의병부대가 중국으로 1차 망명을 할 때 심재 선생 부자도 함께하였으나 심재 선생은 병으로 도중에 귀국하였고, 일암 어경선 선생은 의암 류인석 의병장을 따라 망명지 중국에서 풍찬노숙하며 스승을 측근에서 보좌하였고, 스승인   의암과 수많은 고초를 함께했다.
심재 선생 부자는 의암 선생이 중국으로 2차 망명을 시도할 때도 함께하려고 분주하게 준비하던 중 심재 선생은 지병으로 1898년 2월 17일 갑자기 서거하였다. 이때 류인석 의병장은 심재 선생의 사망 소식을 듣고 학우와 동지를 잃은 아픔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인석(麟錫) 등은 머리를 조아려 말합니다. 또 통곡합니다. 선장(先丈)의 상사(喪事), 이것이 무슨 변고입니까? 자제에게 있어서는 어진 부형이었고, 동지에게 있어서는 존경하는 벗이었고, 사악한 세상에 있어서는 정직한 군자였습니다. 
하루 동안 세상에 있더라도 모두 이로움을 받았는데,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귀신과 짐승이 땅에 가득한 것을 보는 것을 싫어하고, 성사(聖師)가 하늘에 있음을 보는 것을 즐거워하셨더라도 이와 같이 하신 것은 홀로 다른 것을 생각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진심어린 마음과 대의로 함께 제천 사이에서 바삐 다니다가, 요동(遼東)에서 고생하자고 약속하였는데, 이제는 끝나버려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고 하며 애통해했다.
부친과 함께 망명을 준비하다 부친상을 당한 어경선 선생은 부자가 함께 망명하지 못하고 홀로 의암 류인석 의병장을 수행하여 측근에서 보필했다. 선생은 여러 해 동안 망명지 중국에서 활동했으나 모든 것이 여의치 안게 되자 1905년 스승의 권유로  귀국 하였다. 귀국 후 선생은 가족이 있는 보은군 마로면 오천리에 정착해서 강학을하며 후진을 양성하던 중 1916년 7월 21일 서거하셨다.
정부는 2005년 8월 15일 당대 학자로 존경받았고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심재(心齋) 선생과 일암(一菴) 선생 부자(父子)께 건국포장을 추서(追敍)하였다. 
최근 심재선생 부자의 일제 항거에 대한 뜻을 살려 문중과 지역주민들의 힘으로 애국지사 어윤석, 어경선 부자의 추모비를 선영이 자리한 보은군 마로면 오천2구에 세웠다. 오는 3월 17일 추모비 제막식을 앞두고 있으며 우리고장의 자랑이며 후손들에게 심재 선생 부자의 의로운 정신을 기리 세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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