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정(影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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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影幀)
  • 이장열 (사)한국전통문화진흥원 이사장
  • 승인 2019.12.19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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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간 맹추위가 이어지더니 그저께는 밤새 가을비 같은 비가 주적주적 내렸다. 청년은 앞으로 나가려고만 하지만 노년은 자꾸 뒤돌아보는 일이 많아진다. 그리고 비오는 날이면 생각나는 것이 옛날 추억들이다. 내 어릴 때인 아득한 옛날, 그날은 오늘보다 한달이 빠른 11월 18일 저녁 해거름 때였다. 그 무서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아버지께서는 곧바로 갓과 두루마기로 정장을 하시고 안동네로 들어가셨다. 이튿날에는 어린 나도 장례식이 치러지는 큰집으로 들어갔다. 장례기간 동안 친가의 아저씨와 할아버지들은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하면서 ‘곡’을 했고 인척 분들과 타인들은 “어이, 어이, 어이, 어이”하고 곡을 했다. 여인네들은 격정적으로 “아이고, 아이고”하고 울면서 눈물들을 흘렸으나 바깥어른들은 눈물없이 소리로만 곡을 했다. 그러다가 윗어른들이 “인자 그처라!”하시면 여인네들은 훌쩍거리며 모두 울음을 그쳤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다시 “곡해라!”하는 구령과 함께 다시 세 종류의 곡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지금은 볼 수도 없는 광경이었다. 할아버지의 장례식 때는 요즘 그 흔한 사진 한 장은 물론 초상화도 없었다. 신작로가 닦여 있었으나 시골산골이라 사진사를 데려오려면 10리나 떨어진 읍내나 70리나 떨어진 대도시에 가서 사진사를 데려와야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장례식이나 제사때 등장하는 영정 중에 초상화영정은 생시에 화공이 그린 모습인데 사후에는 그것이 영정이 된다. 사진은 장례식과 제사때 사용하는 선택된 사진이 영정사진이 된다.
 초상화영정은 원래 민가에서  ‘영당’에 모셔두고 제사를 지내던 인물화였다. 그 후 「주자가례」에서 영당을 사당으로 바꾸고 신주를 만들어 제사를 지내는 것이 정례화 되었던 것이다. 요즘과는 달리 사진기가 없었던 옛날에는 화공이 인물의 초상을 직접 손으로 그렸다. 따라서 한 장의 초상화를 얻기 위해서는 화공이 오랜 시일동안 같이 기거하면서 세세한 부분까지 관찰하여 모두 화폭에 담아내야 했다. 터럭 한올이라도 빠뜨려서는 안되는 것이 초상화의 기본이었고 인물의 성품까지도 그림에 담아내는 것이 진정한 화공이었다. 그렇게 정확히 그려진 초상화야말로 진정한 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황희(黃喜)정승은 “지금 사람들이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지만 수염이나 머리털 하나라도 같은 경우가 드물다”면서 그런 영정은 딴사람이나 마찬가지이니 영정에 제사하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뜻으로 말했다.
 요즈음은 어떤가? 만나본 일도 없는 역사적 인물의 상상화도 초상화라고 하고 있다. 그것도 국가에서 “표준영정”이라고 공인까지 해주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월전 장우성화백이 그린 이순신장군 영정이다. 진주의기 논개, 신사임당, 세종대왕, 정조 등의 초상화가 모두 본인 아닌 타인의 상일뿐이다. 예수, 석가 같은 종교교주의 상상화에 대해서는 어떤가? 수많은 교회에 있는 예수님의 상과 그림들은 한결같이 유태인들의 상이다. 그러나 절에 있는 많은 부처님의 상은 한국화된 부처님의 상이 많다. 따라서 진본은 하나도 없다. 신앙심을 부조하기 위해서 신앙의 실체를 만들어 받드는 것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류의 그림이나 조각상은 없는 편이 더 신비감과 신앙심이 깊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모두 신자들 마음속에서 그린 상이면 족하다. 어차피 각자의 마음으로 믿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예부터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황희정승의 말처럼 공연히 다른 사람을 모시고 헛일을 하는 것이나 아닐까?
영정에 대해 이야기하다보니 “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 (80년 전에는 저것이 나였는데 80년 후에는 내가 저것이구나) 라고한 서산대사의 싯귀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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