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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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미노에서
  • 홍근옥 (회인해바라기작은도서관)
  • 승인 2019.11.14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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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순례길을 16일째 걷는 중이다. 남들 많이 하는 유행에는 왠지 따라가지 않으려고 하는 편인데, 스페인 까미노를 걷자는 남편의 제안에 그만 가슴부터 설레는걸 어쩌랴. 덜컥 길을 나섰다.

스페인 순례길은 중세시대 유럽인들이 산티아고까지 성지 순례를 하면서 만들어 졌단다. 천 년 동안 수 백 만명이 다녀갔다는 기록도 있는데 모두 종교적인 의미에서 속죄를 하고 구원을 받기 위한, 말 그대로 순례자들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종교적 의미뿐 아니라 단순히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자기 성찰을 하기 위한 방문자들이 함께 방문한단다. 나는 물론 걷기를 좋아하고 여행도 즐기고 종교적인 갈증도 있으니 스페인 순례길은 나에게 딱 맞는 종합선물세트가 아닐 수가 없다.
매일, 하루 대여섯 시간씩 보름 이상  길을 걷는다.
이 정도면 지루할 만도 한데 지루할 틈이 없다. 무엇보다도 길들이  여러가지 모습으로 눈앞에 펼쳐진다.  대부분은 넓은 들판을 가로지르는 신작로 같은 흙길이지만 때로는 좁은 숲길이 되기도하고 때로는 강과 운하를 따라 바람과 함께 걷는 뚝방길로도 나타난다. 그래도 심심할 때 쯤이면 몸을 가누기 힘든 거센 바람이나  몇 시간씩 내리는 비가 재미를 더하기도 한다. 내 몸의 변화를 살피는 일도 즐거움 중의 하나다. 어떨 때는 물집이 생기기도 하고 무릎이나 발목에 통증이 오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문질러주고 쓰다듬으며 내 몸과 대화를 나누곤한다. 그래, 너 참 힘들겠다. 고생이 많지, 그러니 어쩌겠니? 내가 바셀린도 좀  더 열심히 발라주고 천천히 걸을 테니 부디 산티아고까지 잘 견디어주렴.
다양한 순례자들을 만나는 것도 걷는 즐거움 중의 하나다. 한국인을 비롯하여 독일 프랑스 벨기에 영국, 멀리로는 호주와 브라질, 남아프리카에서 온 순례자도 있다. 성별과 나이가 다양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걷는 동안에는 가벼운 인사로 그치지만 숙소에서 만나면 사정이 다르다. 이미 몇일씩 같은 길을 걷다보니 대충 서로의 얼굴을 기억하고 인사도 나누었으니 짧은 영어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미 마음이 통했기 때문이다. 서로 떠듬거리며 정보를 나누고 술을 나누고 음식과 약품도 나눈다.
그런데 몇몇 외국인들을 만나면서 살짝 마음 상하는 일이 생겼다. 일본의  순례길은 잘 알고 가봐야겠다는 사람들이 정작 한국에는 이런 걷기길이 있다는 걸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아니, 한국에도 지역마다 수 많은 까미노가 있고 경치도 훌륭하다고 우겨봐도 반신반의하는 얼굴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나라 걷기길에는 꼭 필요한 것 중에 없는게 몇 가지가 있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우선 도보여행자들을 위한 저렴한 숙박시설이 없거나 부족하다. 대부분이 여행자들은 젊고 돈을 많이 쓰지 않는 편이라서 하루에 만원 남짓의 도미토리와 한끼 오천원에서 만원 정도의 합리적인 식사를 원하는데 이런 시설들은 국내에서는 몇몇 지역을 제외하곤 부족한 편이다.
또하나 부족한것은 지역마다 수없이 개발해 놓은 걷기길들을 통합해서 운영하고 안내하는 시스템이 없다는 것이다. 순례자 여권을 나눠주고 가는 곳마다 도장을 찍어준다든지, 전국의 걷기길을 통합해서 루트를 짜고 구간을 나누고 정보를 제공하는 일은 마치 구슬 서말을 꿰는 것처럼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우리 보은군 만이라도 걷기길을 활성화할 수는 없을까?
알다시피 보은군은 속리산을 비롯하여 많은 명산들과 역사유적들과 문화예술인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것들을 잘 연결하여 루트를 개발하고 마을회관이나 복지관의 일부를 개조하여 저렴한 숙소를 만들고 지역출신 젊은이들에게 관리를 위탁한다면 큰 돈 들이지 않고도 보은을 훌륭한 걷기길의 모델로 자리잡게 하고 청년층 인구유입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내일도 나는 길을 걸을 것이다. 까미노를 내어 준 스페인 사람들과 그들의 조상에게 감사함을 느끼면서, 그리고 언젠가 스페인 뿐 아니라 세계의 젊은이들이 보은의 길들을 걸으며 나처럼 감사할 날이 오길 기대하며 말이다. 그런 날이 온다면 나는 스페인 방문객에 한하여 하루쯤 방을 내어주고 식사를 대접할 생각이다. 그만큼 아름다운 까미노와 사람들의 친절에 감동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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