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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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기억
  • 홍근옥 (회인해바라기작은도서관)
  • 승인 2019.09.05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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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친정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내셨다. 해방이 될 즈음에는 조선철도의 임시직원 신분으로 충주역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셨단다. 그런 아버지의 눈에 비친 일본사람들은 뜻밖에도 예의바르고 신사적인 문명인이었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불확실하던 식민지 청년에게 깨끗한 옷에 자주 목욕을 하고 예쁜 일본식 집에서 나긋나긋한 일본말로 조용조용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비쳐졌다는 게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수많은 조선 사람들이 수탈당하고 고초를 겪었지만 아버지의 나이와 위치에서는 경험하거나 알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아버지는 일본, 그중에서도 동경에 한 번 가보시는 게 소원이다. 그 중에서도 동경역사, 지금의 도쿄 스테이션을 보고 싶으시단다. 조선철도에 근무하셨으니 그럴 법도하다. 한 번 모시고 가겠다고 제안을 해도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하신다. 건강을 핑계로 대시지만 어쩌면 마음 속 깊숙이 자리해온 소원, 혹은 환상이 현실로 나타날 경우의 괴리와 충격을 두려워하시는 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이런 기억이 나에게 몹시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책에서 배운, 내가 알고 있는 역사와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버지이기도 하거니와 이미 90을 훌쩍 넘기신 분의 이런 기억들을 굳이 무어라고 반박하거나 바로잡을 생각은 없다. 그저 일제 강점기에 대한 아버지의 경험, 아버지의 기억은 비교적 좋았구나 라고 생각할 뿐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일제 강점기나 군사독재 시절도 별 고통이 없는 시절이거나 혹은 잘 나가던 세월로 기억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별로 이상한 것이 아니다. 동 시대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과 기억이 꼭 한가지일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나 개인의 기억과 역사는 사뭇 다르다. 물론 역사라는 것이 개인의 기억들이 모여서 형성되는 것이겠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다른 경험과 기억들을 가지고 있을 터, 역사는 그 수많은 기억들의 표준을 정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닐까? 문제는 이렇게 정해진 표준화된 기억, 역사는 과거일 뿐 아니라 현재를 규정하는 강력한 지침이 된다는 것이다.  같은 2차대전 패전국인 독일과 일본의 차이를 보아도 그렇다. 과거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사과하는 독일과, 억울하게 패전했으니 뭔가 다시 해보자는 듯 보이는 일본은 따지고 보면 과거의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차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면에서 역사는 박제화된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 살아있는 생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과거이면서 동시에 현재, 혹은 미래라는 말이다. 우리가 임시정부나 한국전쟁, 혹은 박정희 정권의 역사적 평가에 대해서 서로 다른 주장을 날카롭게 펼치고 싸우면서까지 올바른 역사를 정립하려는 이유도 바로 이것일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일제 강점기에 대한 아버지의 기억에 관해서 이런저런 반론을 제기할 생각이 없다.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현대사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뒤집으려는 일부 시도들에 대해서는 그리 관대할 수 없다. 그것은 나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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