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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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릿고개
  • 최동철
  • 승인 2019.06.13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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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6>

 예부터 5, 6월을 춘궁기 또는 보릿고개라고 했다. 전통적 농경문화였던 한반도에 여름 곡식인 보리가 여물지 않은 상태에서 지난해 가을에 걷었던 식량이 다 떨어져 굶주릴 수밖에 없는 시기를 말한다.

 이때쯤엔 흥부네 같이 식량이 떨어진 가난한 농민들은 산과 들녘에 올라 풀뿌리와 나무껍질 등으로 끼니를 때울 수밖에 없었다. 피죽 끓이기에도 이른 시기여서 갓 나온 갖은 잡초, 칡뿌리나 아카시아 꽃으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흥부는 끼니를 얻기 위해 밥 푸던 주걱으로 볼따구니를 맞아 줄 놀부 네라도 있었지만 그 마저도 없는 많은 이들은 걸식이나 빚을 내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던 사람들은 굶주린 배를 움켜쥔 채 방에서, 길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조선시대 정약용의 시, 기아(飢餓)에 보릿고개의 참상이 그려졌다.
‘시냇가 헌집 한 채 뚝배기 같고 북풍에 이엉 걷혀 서까래만 앙상하네. 묵은 재에 눈이 덮여 부엌은 차디차고 채 눈처럼 뚫린 벽에 별빛이 비쳐드네 집 안에 있는 물건 쓸쓸하기 짝이 없어 모조리 팔아도 칠팔 푼이 안 되겠네 개꼬리 같은 조 이삭 세 줄기와 닭 창자 같은 비틀어진 고추 한 꿰미 깨진 항아리 새는 곳은 헝겊으로 때웠으며 무너앉은 선반 대는 새끼줄로 얽었도다.’

 방랑시인 ‘김 삿갓’의 시에도 처참함이 묘사됐다.
‘길에 쓰러져 죽은 걸인아. 내 네 이름을 모른다마는 어느 곳 청산이 네 고향이냐. 파리는 썩은 살에 모여들어 하루가 분주하고, 까마귀는 네 고독한 혼을 불러 석양에 조상하더라. 일척되는 짧은 지팡이는 유일한 유물이요. 주머니에 있는 한 줌의 식량은 굶을 때 양식이로다. 앞마을 소년들에 부탁하노니 한 삼태 흙 가져다 이 시체의 풍상이나 가려주게.’

 아마도 오늘날의 노인층 뇌리에는 어린 시절 ‘배고픔’이 각인되어있을 것이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보릿고개가 있었다. 하도 오래 굶어 살가죽이 들떠서 붓고 누렇게 되는 부황증에 걸린 이들이 비교적 많았다.

 “밤 새 안녕하셨습니까?” “진지 드셨습니까?” “밥은 먹고 다니냐?”가 통상적 인사말이었다. 북녘 땅은 지금도 ‘이밥에 쇠고기국’을 소원하며 배를 곯고 있다고 한다. 한국인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개발 5개년’덕에 1960년대 후반부터는 ‘보릿고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먹을거리가 흔해진 요즘은 오히려 흰쌀보다 보리쌀이 더 대접받는 귀한곡식이 됐다. 글쎄 적폐세력이 많이 자주 간다는 구치소나 교도소에서도 백미와 보리를 8대 2의 비율로 섞은 혼식을 재소자들에 제공한다는 것이다.
 시중에서도 보통 10kg 백미는 2만 원, 보리는 3만 원대다. 보릿고개는 이제 기억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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