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에서 용이 나기 어려운 시대에 고시합격 현수막이 걸리면 '어느 분의 자제일까' 궁금하고 부럽다. 미장원집 아들은 세계최고 의과대학인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교수가 됐다. 마부작침(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듦)정신으로 수십 년 낙화(불그림)에 매진해 국가무형문화재가 되고, 고향에서 묵묵히 활동했던 예술인이 대통령상 등의 수상 소식엔 존경의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 출향인은 너도나도 사재를 털어 고향사랑 장학금을 선뜻 내놓는다. 가슴이 뜨거워진다.
반면, 연말연초 보은에선 무슨 일이 있었나? 거리마다 ‘해산하라. 물러나라. 규탄한다.’ 는 현수막이 넘쳤다. 모처럼 고향을 방문한 친구는 '보은은 왜 이렇게 밤낮 싸움만 하냐?'는 말에 솔직히 쪽팔렸다. 고향소식을 자세히 지켜본 인사는 '또 사고야?'라며 한숨을 쉰다.
갈등 없는 사회는 없다. 피를 나눈 혈육지간에도 갈등이 있는데 욕구가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살며 충돌이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그런 의미에서 갈등은 생명력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갈등이 이성과 합리로 해결하지 못하고, 감정에 휘둘려 싸움소리가 군청담장을 넘어 160만 도민이 알도록 번지는 건 우리 군의 역량 부족이다. 사실 최근에 벌어진 몇 가지 갈등은 합의가 어려운 문제도 아니었다.
예를 들어, 작년 말 군청에 2개의 국 신설을 비롯한 조직개편 문제도 겉으론 축산과 신설 문제였지만 실은 조직을 키우려는 군과 그걸 막으려는 의회 간의 싸움, 거기에 당과 당의 자존심 싸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거기에 군민은 없다. 어느 것이 군민을 위한 건지 건설적인 방향의 논쟁이라기보다 감정적 요소가 많아 아쉬웠다. 봉합 됐으니 더 말하진 않겠다.
최근에 불거진 대추고을소식 예산은 연간 1억이 채 안되는데 군과 의회, 거기에 군민까지 합세해 싸우고 있다. 필자는 2008년부터 3년간 이 소식지의 위원장을 역임했고, 최근에 다시 위원장을 맡아달라는 청이 있었지만 좀 더 젊은 분들이 참여하길 바란다는 말로 사양했다.
사실 군이나 의원들이 일을 잘하면 군민은 저절로 안다. 하지만 잘한 일도 자꾸 생색을 내면 짜증낸다. 예산을 삭감한 ‘대추고을소식’에 대한 의회의 시각도 그 연장선일 것이다. 그렇지만 예산을 전액 삭감한 것은 잘못이다. 소식지에 불만이 있다면 2009년에 만들어진 조례를 손질하는 것이 먼저다. 검토해보니 손 볼 데가 많다.
의회의 무기이기도한 조례에 소식지의 공적기능을 강화하고, 편집위원의 중립과 편집권 존중, 또는 위원 일부를 의회추천 하는 등의 장치를 만들면 의회의 우려도 해소될 일이다. 현 편집위원 의견을 수렴하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이라도 의회는 조례를 개정하여 소식지가 정상적으로 발행되도록 조처해야 한다. 보은군 1만2천여 가구 중 정기적으로 신문이나 인터넷 뉴스를 구독하는 가구는 2,30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7,80퍼센트 주민은 소식지가 필요하다. 그들은 소식지를 통해 각종 농사정보, 바뀐 복지, 군수나 의원들의 활동과 출향인 소식을 안다. 다만 소식지가 정보를 전하는 것에 벗어나 주민생각과 다른 자화자찬, 언론이 갖는 비판기능을 하면 반발을 사게 된다. 집행부의 과욕을 제어하는 것은 편집위원의 몫이다.
상습적으로 갈등을 유발하는 것은 병이다. 군민과 출향인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맘에 안 든다고 간부공무원들이 데모하듯 덜컥 기자회견을 해서 의회를 압박하고, 그렇다고 의회가 감사원 감사청구를 하는 것은 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럴 시간에 간부들은 의회를 설득하고, 의원들은 여론을 수렴했어야 마땅하다.
군민도 반성할 부분이 있다. 단체의 이름을 빌려 갈등을 확산하는 자극적 현수막부터 걸고 보는 행태는 옳지 않다, 앞으론 그러지 않아야 한다. 출향인과 관광오신 손님, 청소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갈등치료의 특효약은 하나 밖에 없다. 소통이다! 적대적 소통이 아닌 포용적 소통이 약이다. <논어>에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란 말이 있다. ‘군자는 서로의 생각을 조절하여 화합을 이루지만, 소인은 이익을 위해 화합을 이루지는 못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어려워도 군자의 길을 가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