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야 채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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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워야 채워진다
  • 시인 김종례
  • 승인 2018.12.1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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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들판은 오랜 숙면 속으로 들어갔다. 온갖 생명력으로 대지를 열광시키고 사람의 마음까지 뿌듯하게 채워주고는 조심스런 몸짓으로 침묵하고 있다. 서로 몸 기대어 흐느끼던 마지막 검불때기조차 스스로 자양분이 되어 내려앉고, 유유자적 삶의 껍데기들을 다 벗어던진 후 진정 고요한 휴식에 잠입하였다. 그렇게 가을은 버림의 섭리를 가르치고는 겨울에게 선뜻 의자를 내어주고 말았다. 비움과 채움의 기로에서 괜스레 사람들만 분주하고 고민이 깊어가는 12월! 쉽사리 버리지 못하고 채우는 일에만 몰두하지는 않았는지 한 해를 뒤돌아보게 되는 시점이다. 무엇을 버려서 무엇을 얻어야 할지와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한 해의 종착역이다.
 신발장에는 신발이 늘어만 가고, 옷장에는 옷들이 쌓여만 가고, 냉장고에 음식물을 채우기만 하고, 머릿속에는 허상의 꿈만 가득했던 젊은 날의 잔해들을 뒤돌아보며, 불필요한 것들을 조금씩 버리는 재미에 빠지게 된 것도 전혀 우발적이지는 않다. 무소유의 의미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음이라고 하니 말이다. 끝까지 책임지며 짊어지고 가야 할 우리들의 삶의 배낭! 언젠가는 모두 쏟아내고 텅 빈 배낭마저 고이 접어야 할 것은 당연지사이기 때문이리라.
 이쯤에서 당무유용(當無有用) 이란 적절한 숙어를 떠올려 본다. ‘없음이 곧 쓰임이다.’‘비워야 쓸 수 있다’란 뜻이 담겨있다. 그릇은 깨끗이 비움으로써 다시 새 것을 담을 수 있으며, 버리고 비우지 않고서는 새로운 것이 들어설 수가 없다. 비워야만 채울 수 있다는 이치로 과욕을 삼가라는 광의의 뜻이 숨어있다. 성경에서도 ‘마른 떡 한 조각만 놓고도 화목한 것이 제육이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며, 물질적인 풍요보다는 정신적인 만족과 감사를 가르치고 있다. 또 ‘즐거움은 마음을 비우는데서 비롯된다.’라는 낙출허(樂出虛)란 말도 있지 않은가! 무거운 화관을 제 발 아래 내던지고서야 가벼이 춤추던 모란 가지가 그러했다.
 이 시대에 안타까운 골칫거리 중 하나가 TV라고 생각한다. 어쩌다 TV란 놈을 켜서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결국 뉴스에 고정을 시켜보지만, 그 시간마저 세상의 절망풍경이 모두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저런 절망적인 세상 이야기들이 점진적으로 많아져 정신적 폐허를 가져오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아직 분별력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에게 유해한 프로그램이나 영상들이 즐비하게 노출됨은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아마도 시대가 이다지도 어둡고 황량하게 비춰지는 것도 비움의 신비를 망각하고 채움의 욕망에만 사로잡혔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저런 물질적, 정신적인 욕망의 마차에 끌려 다니며, 영혼의 자유를 회복하려는 의지나 신념을 잊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아름다운 비움의 지경은 마음을 비운 사람의 영혼이기 때문이다. 버리고 비우는 침식작용은 우리 모두의 영혼을 아름답고 자유로운 경지로 인도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삶이란 소유와 비움의 적절한 조율과정이어야 하며, 버림과 비우기의 연속과정이어야 할 것이 분명하다. 세상의 절망풍경을 밝고 맑게 치유할 수 있는 명쾌한 답은 버림이다. 비움이다. 절제정신이다.
 지금은 한 해 동안 지고 온 배낭의 무게를 가늠해 보며, 모두 비워내어 그 속에  투명하고 잔잔하게 흐르는 평화의 강물을 소유해야 할 시점이다. 불필요한 가식을 버리고 난 뒤의 진솔한 양심으로 다시 소망의 새해를 맞이해야 할 것이다. 퇴적작용을 선호하는 채움의 원리보다 침식작용을 고수하는 비움의 원리로 기해년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비워진 몸과 마음으로 내일을 향한 창의력과 새로운 도전으로 앞으로 나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무유용’ 비움과 채움의 원리를 깨달아 행복한 새 년을 마중할 마음의 준비가 절실히 필요한 지금이다, 어려운 이웃과 따뜻한 온기를 나눔으로써 어둡고 추운 이 겨울을 다 함께 견뎌내야 할 과제가 주어진 달이다. 비움 속의 축복, 고난 속의 환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달아, 비우고 비운 마음으로 아름다운 희망풍경을 만들어 가는 새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발걸음이 유성처럼 가볍고 자유로운 기해년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 아마도 방금 금식 고해성사를 막 마친 어린 사제의 발걸음이 그러하지 않을까? 그리도 충만하였던 모든 걸 다 비우고서야 평화로운 숙면에 몰입한 내 작은 정원도 정녕 그러하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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