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 비마라사 석조관음보살입상
“통일신라시대 보살입상 양식 반영한 고려초기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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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비마라사 석조관음보살입상
“통일신라시대 보살입상 양식 반영한 고려초기 불상”
  • 황선식 시민기자, 학예사
  • 승인 2013.12.26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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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보은문화재
며칠 전 내린 눈으로 멀리 보이는 속리산이 온통 하얀 이불에 덮여 있다. 어느덧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인 동지(冬至)가 지나고 있다. 다행히도 오늘 산책하는 날엔 바람도 잔잔하고 기온도 온화한 편이다. 그래도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오리 숲으로 한걸음씩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런데, 길을 걷다가 문득 생각나는 곳이 있어 오던 길을 뒤돌아 사내리 작은 소로를 지나 속리산면 북암리 부처골바위에 있는 비마라사를 찾았다.
이번 시간에는 보은지역에서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석조관음보살입상과 옛 부터 불교에서 보살이라는 의미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이 비마라사(毘摩羅寺)는 속리산 서쪽, 속칭 부처바위골에 1999년에 창건된 사찰이다. 이곳에 있는 관음전은 자연바위를 지붕으로 하여 지어졌는데, 관음전 밖에 석조보살입상이 서 있다. 석조보살입상은 주지스님이 인근에서 수습하였다 하는데, 그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불상이다.
이 불상의 전체높이는 151cm 정도이며, 불신(佛身)과 대좌(臺座)가 있으나 광배(光背)는 흔적만 있고 없어졌다. 불신은 목과 허리부분이 절단된 것을 다시 붙여놓은 상태다. 왼손을 가습에 대고 오른손은 옆으로 내려 천의 자락을 잡고 있는 형상인데, 불신의 비레는 균형이 잡혀있고 몸의 굴곡이 부드럽게 표현되어 있다. 머리 위에는 보관(寶冠)을 썼는데 삼면관(三面冠)으로 중앙에 화불(化佛)이 배치되어 있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임을 알 수 있다.
목걸이가 가슴에 넓게 늘어지고 팔뚝과 팔목에는 팔찌가 있으며, 몸의 뒷면에는 부드러운 양감과 치마 주름이 잘 표현되어 있다. 또한, 대좌는 옆면에 앙련이 부조된 낮고 둥근 형태이며, 아랫부분이 결실된 것으로 보인다. 화강암 재질로 입상과 대좌가 하나의 석재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전하는 설에 의하면 언젠가 마을의 청년이 도굴하여 운반 중인 것을 마을사람들이 만류하였는데 운반 도중 목 부분과 동체부분이 부러지게 되어 그 이후에 시멘트로 접착하였다고 한다. 이 불상은 원만한 상호(相好)와 천의(天衣)의 처리, 양쪽 팔의 장식, 단아한 동체(胴體)의 조성양식과 수법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보살입상 양식을 반영한 고려초기 불상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불교에서 보살이라는 의미는 무엇인지 알아보기로 하자.
보살은 보리살타의 준말로 인도 산스크리트어 보드사티바(bodhisattva)를 음역(音譯: 한자음으로 외국어의 음을 나타냄)한 것이다. 이 말은 ‘깨닫다’는 말인 보드(bodh)와 정이 있다는 사티바(sativa)의 합성어다. 이를 다시 의역하면 ‘깨달은 자로 정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리말에는 깨달은 사람을 성자, 선각자 등으로 말하지만, 인도에서 깨닫는다는 말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고 한다. 이런 ‘깨닫는다’는 뜻의 보살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오면, 부처보다는 깨달음이 적은 사람, 부처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행중인 사람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 보살상은 대승불교권에 속하는 중국, 우리나라, 일본에서 옛 부터 많이 조성하여 왔으며, 관음전이나 문수전, 보현전 같은 전각에는 주불(중심 불상)로 모셔지지만, 대웅전이나 무량수전, 약사전, 미륵전 등에서는 주로 주불을 협시(보좌)하는 불상으로 등장한다.
/황선식 시민기자,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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