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찰은 사라져도 마애불상은 그대로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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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찰은 사라져도 마애불상은 그대로 남아”
  • 황선식 시민기자, 학예사
  • 승인 2013.10.10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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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 상고암 마애불상군
어느덧 아침 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고 그 바람결 따라 거리의 코스모스는 어서 가을이 왔으면 하고 손짓하고 있다. 시간의 흐름이 살(箭)과 같다고 했던가! 벌써 찬이슬이 맺힌다는 한로(寒露)가 눈 앞에 왔다. 이 시기 즈음은 찬이슬이 맺힐 때여서 기온이 더 내려가기 전에 추수를 끝내야 하기에 농촌은 곡물을 수확하기 위한 타작이 한창인 때다. 또한, 가을 단풍이 짙어지고, 제비 같은 여름새와 기러기 같은 겨울새가 교체되는 시기다.
이런 계절에는 산에 오르기 안성맞춤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속리산에서 가장 높은 암자(庵子)이면서 비로봉 아래 자리잡고 있는 상고암(上庫庵)에 올라가 보고자 한다.
상고암과 관련된 기록인 [상고암중창공덕기]에 의하면, 신라 성덕왕 19년(720년)에 창건, 조선 고종 13년1876년에 인명대사(仁明大師)가 중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1897년 보봉(普峰)이 중수하였으며, 현재의 상고암은 한국전쟁으로 폐사 되었다가 1963년 법혜라는 승려가 법당을 중건하였다. 현 사찰과 관련된 전각(극락전/영산전/산신당/약사전), 불상과 불화들은 1960년-70년대 이후에 조성된 것이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법주사 창건 당시 목재를 보관하던 창고였기 때문에 상고암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졌다고도 한다. 또한 상고암 외에도 중고암(中庫庵) 하고암(下庫庵)이 있었으나 폐사되고 상고암만 암자로 남은 것이라고 전한다.
한편, 상고암의 본전인 극락전 맞은편에 서향으로 자리하는 자연 암벽에 6구의 마애불이 상, 하 2단으로 배치되어 조각되어 있다.
이 마애불상군에는 각각 사천왕상, 보살상, 여래상 등 6기의 상이 새겨져있다. 가장 좌측에는 탑을 들고 있는 다문천왕이 있고 가운데 증장천왕, 광목천왕 그 옆에는 비파를 들고 있는 지국천왕이 새겨져 있다. 각각의 사천왕들은 장방형 얼굴에 갑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있다. 사천왕 우측에 조각된 여래상을 보면 민머리에 화관을 쓰고 있으며, 두 손을 합장한 채 앉아있다. 가장 위쪽에 있는 보살상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연주형 목걸이를 하고 있으며 손에는 긴줄기가 달린 연꽃을 들고 앉아있는 모습으로 보아 관음보살상으로 추정된다. 마애불상군 가운데 조각이 가장 뚜렷하다.
이 마애불상군의 제작된 시기를 알려주는 명문이나 기록은 없으나, 상고암 주변에서 조선시대의 기와편이 다수 발견되고, 마애불상군의 상태로 보아, 1876년 무렵 인명대사가 상고암을 중창할 당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유사한 형태의 문화재로 남원 개령암지 마애불상군(南原 開嶺庵址 磨崖佛像群),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 (慶州 南山 塔谷 磨崖佛像群), 충주 봉황리 마애불상군(忠州 鳳凰里 磨崖佛像群)등이 있다.
/황선식 시민기자,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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