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독특한 석탑양식 돋보여”
상태바
“고려시대 독특한 석탑양식 돋보여”
  • 황선식 시민기자, 학예사
  • 승인 2013.09.05 08: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다시보은 문화재(11) 법주사 여적암 다층청석탑
어느덧 모기입도 삐뚤어진다는 처서(處暑)가 지나서인지, 그 뜨겁던 더위도 수그러지고 바람도 제법 시원해졌다. 그래서일까!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모습이 매우 활기차 보인다.
이번에 만나볼 문화재는 법주사 주차장에서 묘봉(妙峰)방향으로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계곡 끝에 위치하고 있는 아담한 사찰 여적암(汝寂庵)과 다층청석탑(多層靑石塔)이다.
여적암은 법주사에 속한 암자로 1694년(조선 숙종20)에 여적당(汝寂堂)이 창건했으며, 그 후 1901년(光武 9) 당시 주지였던 남응익(南應翊)이 중창하였다. 현재의 여적암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뒤 1958년에 어느 수도승이 초암을 짓고 살던 것을 1964년 행담(行潭)이 중건하였다.
이 여적암은 원래부터 있던 암자에 여적이라는 승려가 온 뒤부터 여적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데, 그 이름과 관련되어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오래전 이 절은 그 일대에서 가장 부유하였으나 역대 주지들이 물욕(物慾)에 집착하여 남에게 베풀 줄을 몰랐다. 어느 해 제자로 있던 여적은 스승의 탐욕을 깨우치기 위해 주먹밥 아홉 개를 만들어서 함께 수정봉으로 갔다. 그곳에서 여적은 구멍 뚫린 바위 앞에 앉아 여적암 역대 주지의 이름을 차례대로 부르며 주먹밥을 한 개씩 던지자 큰 뱀들이 차례대로 나와서 받아먹고 다시 구멍으로 들어갔다.
일곱 번째에 나오라고 부른 이름은 주지의 은사(恩師)였으므로, 주지는 뱀으로 태어난 스승을 보고 놀라 여적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여적은 역대 주지들이 욕심이 많아 뱀이 되었지만, 죽어서도 여적암의 재물을 잊지 못하여 여적암이 잘 보이는 수정봉에 산다고 하고, 남아 있는 한 구멍이 현재의 주지가 죽어서 살 곳이라고 하였다. 그 뒤 주지는 대법회를 열어 재산을 모두 나누어 주고 수행에 열중하게 되었고, 그 이후부터 여적암이라 불렀다고 전한다.(출전: 한민족대백과사전)
현존하는 건물로는 인법당(因法堂)과 삼성각(三星閣), 요사채 등이 있고 법당에는 조선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목조아미타불좌상이 있으며, 좌우협시보살상은 근래에 조성된 것이다. 또한, 삼존불 우측에는 1901년 조성된 면본채색(천에 색을 칠한)된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다.
한편 법당앞에는 다층청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화강암 석재 2단을 깔아 지대석을 만들고 그 위에 초층탑신을 올려놓았다. 그 위에는 8층의 청석 옥개석을 층층이 쌓았으며, 낙수면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다.
이 탑의 재질인 청석탑(靑石塔)은 통일신라말에서 고려시대에 성행했던 특이한 형태인데, 이 탑과 유사한 문화재로는 해인사 원당암 다층석탑(海印寺 願堂庵 多層石塔)과 충주 창룡사 다층청석탑(忠州 蒼龍寺 多層靑石塔) 등이 남아있다. 탑의 형태와 연꽃문양과 탑재질(청석)이 같을 뿐만 아니라 크기와 조각수법이 비슷하다. 청석은 푸른 빛깔을 띠고 있어 오래전부터 실내 장식이나 건물의 외부 장식 등에 널리 활용되었다. 이 법주사 여적암 다층청석탑(汝寂庵多層靑石塔)도 조성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황선식 시민기자, 학예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