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적 삶을 표현한 보은 법주사 철솥
상태바
공동체적 삶을 표현한 보은 법주사 철솥
  • 황선식 시민기자, 학예사
  • 승인 2013.08.14 08: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다시보는 보은문화재(9)
올 여름! 유난하게도 긴 장마와 찌는 듯한 더위로 가래떡 처럼 축 늘어져 있는데, 이런 날씨에도 아랑곳없이 힘찬 몸짓으로 울어대는 매미는 마치 제철을 만난듯하다.
이 무더운 계절을 표현하는 우리 속담 중에 ‘푹푹 찌는 가마솥 더위’ 라는 말도 있는데, 이번에 소개할 유물은 어쩌면, 바로 지금 시기와 잘 맞는다고 할 수 있겠다.
오솔길을 따라 일주문을 통과하고 금강문을 지나면, 오른쪽 보호각 안에 무엇인가 검고 커다란 물체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오랜세월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바로 보물 제 1413호로 지정된 법주사 철솥이다. 무슨 의미를 가졌기에 보물로 지정되었을까? 예로부터 솥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먼저, 이 커다란 유물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이 철솥은 거대한 사발(大鉢) 모습을 하고 있는데, 높이 1.2m, 지름 2.7m, 둘레 10.8m, 두께 10∼3㎝, 무게는 약 20여 톤으로 추정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원래 조사각(祖師閣:사찰과 인연이 깊은 스님 영정을 모신곳) 뒤편, 하천쪽으로 30미터 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가 지금 위치로 옮겨진 것이라고 한다.
이 철솥은 법주사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몸체에는 아무런 문양이나 기록이 없어 제조연대·제작자 및 제조방법 등을 알 수 없다. 기술사적 측면에서 볼 때, 녹는 온도가 청동보다 훨씬 높은 주철로 주조된 대형 주물솥이면서 거의 완벽한 조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점, 국내에 유례가 없는 희소성 등에서 가치가 큰 유물로 평가되고 있다. 이와 유사한 예로는 충남 논산 개태사 철확(開泰寺 鐵?)과 충북 청주 관음사 철확(淸州 觀音寺 鐵?)등이 있다.
그러면, 예로부터 솥(?)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솥은 일반적으로 물·국 등을 끓이고 밥을 짓는 데 쓰는 그릇이며, 재질도 흙(土), 청동(靑銅), 철(鐵), 옥(玉) 등 다양하다.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세발 토기 솥, 경주 천마총에서 출토된 청동제 솥을 보면 우리 선조들은 일찍부터 솥을 취사용으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대사회(古代社會)에서는 단순한 취사용이 아닌 하늘에 제사지내는 제기(祭器)를 대표하는 신물(神物)로도 사용되었다. 고대 중국 하(夏)나라 우(禹)왕은 천하 9주의 금속을 모아 솥을 만들어 제위를 전승하는 보물(寶物)로 삼아 은(殷), 주(周), 진(秦)으로 전했다고 한다. 또한,『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다리가 부러진 노구솥 한개가 있을 뿐이다.” 라는 기록이 있으며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조선후기 백과사전』 섬용지(贍用志)에도 “옛날에는 다리가 있으면 기(錡)라 하고 없으면 부(釜)라 하였다. 대구(大口)의 것은 부, 소구의 것은 복(?)이라 한다.” 라고 언급되어 있다.
뿐만아니라, 낙랑 9호분에서는 토기(土器)로 만든 솥이 출토되었고,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주방에 솥이 걸리고 그 위에 시루가 얹혀 있는 그림이 남아있으며, 경주 98호분과 가야고분 등에서도 무쇠 재질의 다리가 있는 솥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이런 기록들과 유적지 출토유물 등으로 짐작컨대 우리 나라에서 솥이 사용된 시기는 삼국시대 이전부터로 추정된다. 이와같이, 솥(?)은 단순 그릇의 의미 뿐만 아니라, 고대사회에서는 제사(祭祀)와 정치(政治)의 상징으로 표현되기도 하며, 또한 공동체적 유대관계를 상징하기도 했다.
/황선식 시민기자, 학예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