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 법주사 팔상전
상태바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
  • 황선식 시민기자, 학예사
  • 승인 2013.06.06 07: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다시보는 우리문화재(3)
이번에 우리가 살펴볼 문화재는 법주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 것! 바로 팔상전이다. 당시 사람들은 왜? 전란으로 불타버렸던 탑을 20년 넘는 긴 과정을 거치면서까지 재건하려 했을까? 등을 생각해보며, 천천히 팔상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보자.
법주사 팔상전은 5층 목탑 형태를 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하나뿐인 목조 건축물이다. 탑 내부 벽면에 부처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하였다. 현재 모습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전쟁이 끝난 이후 1626년(인조 4) 사명대사에 의해 다시 지어졌다. 그 후, 1968년 완전 해체 복원공사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건물 기단부는 원래 있던 주춧돌 위에 그대로 다시 세웠기에, 통일신라시대 것이다. 전체 높이는 약 22.7미터로 현존하는 탑파(塔婆) 중 가장 높다. 건물 형태를 살펴보면, 탑으로 올라서는 각 면은 돌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탑의 낮은 기단 위로 연결되어 크기에 비해 안정감을 준다. 건물 내부 전체는 사리를 모시고 있는 공간, 불상과 팔상도를 배치한 곳, 예배를 하기 위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1층과 2층은 네 면이 각 5칸이고 3·4층은 3칸 5층은 2칸씩이며 정방형으로 되어있다. 지붕은 사모지붕이며, 상륜부(相輪部)를 갖추고 있다. 목조건축의 백미라 할 수 있는 공포(?包: 목조건축에서 지붕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만든 부재로 장식하는 역할도 한다)를 보면, 1층부터 4층까지는 기둥위에만 공포를 짠 주심포 양식을, 5층만 다포양식으로 조성되어 있어 특이하다. 또한 이 탑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2층 지붕 모서리의 4면에 양손을 들어 추녀를 받들고 있는 인물 조각상이다. 모두 생김새가 다른 이 상들은 조선 후기 조각의 해학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젠, 건물내부를 살펴보자. 안쪽 사천주(四天柱: 심주(心柱)를 중심으로 네 모서리에 배열된 기둥)의 네 벽면에는 석가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그린 팔상도가 그려져 있다. 이 팔상도는 우측에서 좌측부터 도솔래의상(도솔천에서 내려와 북인도 카칠라 왕궁 왕비인 마야부인의 꿈속에 나타나는 그림)을 시작으로 비람강생상, 사문유곤상, 유성출가상, 설산수도상, 수하항마상, 녹원전법륜상, 쌍림열반상이 그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청색과 홍색의 채색이 강하며, 1897년(광무 원년)에 조성되었다. 또한, 금어(金魚: 그림을 그린 승려를 말함)는 금호(錦湖)와 영운(影雲) 등이다.
팔상도 앞에는 각각 항마촉지인상, 열반상 등이 차례로 봉안되어 있는데, 열반상만 17세기 작품이고 나머지는 조선시대말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각 상 대좌아래 옥돌로 된 천불상들이 있으며, 17세기 중창당시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8년 9월 팔상전을 해체 수리하던 중 심초석(心礎石)에서 사리구(舍利具)와 사리공의 네 벽과 위를 덮었던 동판(銅版)5매가 원형 그대로 발견되었다. 그 기록에 따르면, 정유재란 때 탑을 비롯한 모든 건물이 불타 없어졌는데, 전란이 끝난 직후인 1605년(선조 38)부터 1626년(인조 4)까지 복원 사업이 진행되었고 사명대사(泗溟大師)가 여기에 관여하였다고 언급되어 있다.
이와같이, 법주사 팔상전은 건축 수법이나 구조에서 조선 후기의 형식을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오래동안 이어져 온 전통이 남아있는 우리나라의 유일한 목탑(木塔)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황선식 시민기자, 학예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