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1130년 9월 15일(음력), 일가가 전란을 피해 임시로 거처하던 복건 우계현에서 삼남으로 태어났다. 피난살이였으니 집은 가난했다. 하지만 다섯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문장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지적으로 매우 조숙했다.
“나는 5,6세 때부터 생각에 잠겨 괴로워했다. 대체 천지사방의 바깥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사방은 끝이 없다고들 사람들이 말하지만 나는 꼭 끝이 있을 것만 같았다.”는 어린 시절을 회고하는 그의 글에서 비범함을 알 수 있다.
주희가 11살 되던 해 아버지 주송은 금나라에 대한 화친 정책에 반대하다가 중앙 관계에서 추방당했다. 그리고 14살 때 세상을 떠났다. 그럼에도 주희는 유언에 따라 호적계, 유백수, 유병산 세 사람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 후에도 꾸준히 학문에 매진한 그는 공자, 증자, 자사, 맹자로 이어지는 유학의 전수계통과 사서를 중시했다. 사서에 주석을 달고 널리 경전을 연구하며 재해석을 시도했다.
궁극에는 주자학을 완성했다. 주자학의 사상적 특징은 불교와 도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리학이라고도 하는 이기심성학(理氣心性學)을 수립한 것이다. 이와 기를 두 기둥으로 심고 생성론, 존재론으로부터 심성론, 수양론에 걸쳐 정연한 이론을 완성시켰다는 사실은 유학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후 청나라 중기에 이르기까지 주자학파에 속한 학자는 물론이고 주자학을 비판하는 학자들도 모두 주희의 이론을 토대와 출발점으로 삼았다. 주자학은 무려 오백여년동안 중국대륙, 조선반도, 일본열도의 지식인 사회를 지배했다.
위대한 철학가이자 교육자인 주희가 ‘어려서부터 열심히 학문에 힘써야한다’고 배움을 권했다. 시간은 화살처럼 빠르고 한번 지나가면 되돌릴 수 없기에 한 눈 팔지 말고 열심히 학문에 힘써야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권학문(勸學文)은 ‘오늘 배울 것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올해 배울 것을 내년으로 미루지 말라/ 해와 달은 가고 세월은 나를 기다리지 않으니/ 오호, 늙었구나. 이것이 누구의 허물인가/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잠시라도 시간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연못가의 봄풀은 아직 꿈을 깨지도 못하는데/ 댓돌 앞의 오동나무 잎은 이미 가을 소리를 전하는 구나‘고 나이 상관없이 학문에 매진할 것을 호소했다.
박근혜정부가 논란이 되어왔던 학업성취도평가를 ‘초등학교는 폐지’, ‘중학교는 국어, 영어, 수학’으로 과목을 줄여 시행키로 했다. 모름지기 주희가 권한 ‘학문’은 요즘 학생들이 주력하는 ‘시험’만을 위한 공부가 아닐 것이다. 경쟁과 우위를 점하는 평가로 더 많은 돈과 지위를 차지해서 나만 잘살면 된다는 식의 이기적인 공부는 학문이라 볼 수 없다. 학문은 내면의 크기를 키우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옳고 바르게 갖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다.
저작권자 © 보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