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현암에 묻힌 대곡의 정신
상태바
모현암에 묻힌 대곡의 정신
  • 이흥섭 실버기자
  • 승인 2013.04.04 08: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보은읍 종곡리 저수지 뒤 동북쪽 산골짜기 종산에 모현암 이라는 작은 기와집이 서 있다.
오랜 세월 속에 비를 맞고 먼지가 앉아 퇴락한 이 집이 명종 때 이름 높은 학자 대곡 성운 선생이 세상의 뜻을 버리고 숨어서 살던 곳이다.
선생은 이조 사상 가장 맑게 숨어 산 사람으로 이름이 난 사람이다. 선생은 창녕 성씨로 이름은 운이고 자가 건숙, 호는 대곡이다. 1497년 선공감 부정 세준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집안은 이조에 들어와서부터 많은 학자와 현관을 배출함으로써 명문이 되었다.
홍문관 대제학을 문형이라고 하는데 조정의 모든 글을 좌우할 수 있다는 것으로 매우 영광스러운 벼슬인 만큼 어려운 자리인데 부자가 연달아 지낸 현과 세창이 선생의 가까운 일가였으며 큰아버지인 대사헌 세순의 두 아들 수침과 수종은 선비 사이에서 학계의 학과 매화같은 존재라 하여 존경을 받았다. 수침의 아들 혼은 우리나라 18현의 한 사람으로 문묘 향교에 배형되었다.
이와같은 학자들의 집안에서 태어난 선생은 어려서부터 글을 배워 학문이 뛰어났다고 한다. 원래 성품이 온순하였고 뜻과 기상이 장하여 작은 일에는 관심이 없었고, 학문은 깨끗하고 맑았다. 퇴계 이황이 숨어있는 선생이라고 부른 이가 바로 선생을 말한 것이다.
선생은 1531년 중종 26년에 사마시에 올랐으나 1545년 명종 원년 사화로 그의 작은형이 모함을 받아 형벌을 받다가 죽은 뒤 세상에 뜻을 잃고 처가 고장인 보은읍 종곡리에 내려와 종산 아래 집을 짓고 대곡제라 현판을 걸고 숨어 버리니 그의 호가 되었다.
명종이 즉위하여 광릉 침봉을 제수하고 조정에 나올 것을 권하니 선생은 병들었다는 핑계로 벼슬을 사양하고 대곡제에서 한발도 나오지 않았다. 그곳에서 김제 군수 김천부 전한 김처우 형제의 아들을 비롯한 일가자제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그가 이 골짜기로 들어와 30여년을 지내는 동안 몇 번이나 조정에서 벼슬을 주며 불었으나 끝내 사절하고 이곳에서 한가한 때면 소를 타고 가서 홀로 앉아 거문고를 타며 즐길 뿐이요. 혹여 사람이 들으려 하면 타지 않았다고 한다. 또는 속리산으로 들어가 몇날씩 산수를 즐기며 노닐다가 돌아오곤 했다.
선생이 이렇게 은거하고 있는 동안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깊은 골짜기이건만 선생을 흠모하고 사랑하는 벗들이 줄지어 찾아오기도 했다. 바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몇 달이고 지내곤 하였다.
별들이 모여들던 모현암 세월속에서 몰지각한 후손들이 자기들 내키는데로 법도 모르고 권력을 휘둘러 문화재 보호를 소홀히 하여 문화재 상실에 앞장서고 귀중한 자산을 누군가와 결연하여 도장을 찍고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자랑스럽게 내보여야 할 장소가 어이없는 행동으로 인해 근처에도 못 가는 상황이다. 그가 떠났어도 절은 항상 비어 있어도 모현암에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요 물도 못 마시게 하고 있다.
자라나는 어린이들이 그 집이라도 보고 역사의 자랑, 학계의 자랑을 알아야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운 마음이다. 그 옛날 많은 별들이 모여 학문을 닦던 그 곳의 마당이라도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지금은 문을 열어보기는커녕 앞마당도 못들어 가고 폐허가 된 모습을 바라보는 현실에 가슴 아플 다름이다.
/이흥섭 실버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