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빈예찬(淸貧禮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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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빈예찬(淸貧禮讚)
  • 최동철
  • 승인 2013.03.21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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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한쪽은 물질적인 풍요를 한껏 누리면서도 자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또 한쪽은 물질적으로는 어려운 상황에 있으면서도 자기보다 더 곤궁한 이들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물론 부자와 가난을 나누는 객관적 표준이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빈궁(가난하고 궁색함)의 문제는 지극히 주관적이다. 즉 빈부의 결정자는 바로 자기 자신인 것이다.

또한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빈궁이 존재한다. 물질적 빈궁과 정신적 빈궁이다. 그 중 지향함이 없이 탐욕만 추구하는 정신적 빈궁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있다. 참으로 가난한 자이며, 가장 슬픈 빈궁의 모습이다.

요즘 청문회에 출석해 죄지은 듯 몸을 사리고 있는 인사들을 보면 괘씸하다 못해 오히려 측은함이 느껴진다. 4성 장군 출신이면 최고의 명예인데 ‘돈의 노예’로 전락된 듯했다. 공직자가 되려면 ‘청빈’이 최우선일 텐데 거개가 정신적 빈궁한 사람들로 비쳐졌다.

단순히 게으르거나 무능해서 가난하게 된 사람들을 ‘청빈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청렴이 가난의 원인이 될 때만 그 가난을 청빈이라 한다. 덕과 능력이 있어 큰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에 오를 수 있는데도 그 자리에 앉는 것 자체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사양하는 것을 ‘청빈’이라 한다. 또한 그런 지위에 있는 공직자가 불의와 타협하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데도 도덕적인 이유에서 타협을 거부하므로 가난하게 되는 사람을 청빈하다 한다.

청빈의 표본으로는 옛날 요임금이 나라를 물려주려하자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들어 귀가 더럽혀졌다’며 흐르는 물에 귀를 씻었다는 허유가 있다. 그리고 한 수 더 떠 허유의 귀 씻은 더러운 물을 소에게 먹일 수 없다고 웃물로 끌고 가서 먹였다는 소부도 있다. 이들은 부귀영화를 보장하는 벼슬을 거절하고 가난하게 살다 갔다.

가톨릭에서의 ‘청빈’은 복음적 권고의 하나로 ‘스스로 선택한 단순 소박한 가난’을 뜻한다. 자발적 가난은 물질적 결핍이 아니라 물질적 소유욕에서 해방된 자유를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예수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가르침을 주었다.

엊그제 즉위식을 가진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톨릭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가난한 교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전까지 그의 실제 삶도 청빈과 검소함으로 유명했다.

옛날이나 요즘이나 청렴한 공직자와 탐욕이 없는 서민들은 대부분 가난하게 산다. 그래서 청문회에 나선 일부 인사의 ‘수십, 수백억 원’ 재산형성이 마치 ‘능력과 실력’만으로 치환되는 현상을 경계하는 것이다. 자칫하면 청빈을 비아냥대는, 정도가 무너진 사회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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