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암 손병희선생 생가 문화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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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 손병희선생 생가 문화탐방
  • 이흥섭 실버기자
  • 승인 2012.07.12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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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도서관 문학강좌 수강생들이 의암 손병희선생의 생가를 방문하여 문화해설사로부터 손병희선생에 대한 설명을 듣고있다.
의암 손병희 선생의 유허지에 문화탐방을 다녀왔다.
의암 손병희 선생은 1861년 4월 8일 충북 청원군 북이면 대주리(현 금암리)에서 손의조 공의 셋째 부인의 서자로 태어났다.
1882년 22세 때 동학에 입교하여 제2대 교조 해월 최시형 선생의 신임을 얻어 수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1894년 동학혁명 때 북접의 통령으로 혁명군을 이끌고 남접 전봉준 선생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공주우금회 전투에서 일본군에 대항, 1897년 12월 24일 교조로부터 교통을 이어받아 제3대 교주가 돼서 1901년 일본을 거쳐 상해로 망명해 해외문물을 접하고 개화에 주력했다.
1905년 12월 1일 친일단체인 일진회의 이용구 등 친일분자 62명을 출교 조치하고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여 재정비했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을 필두로 거족적인 3.1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 받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21년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1922년 5월 19일 서울 상춘원에서 요양하다 62세의 일기로 순국 1962년 대한민국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 1등급 추서 묘소는 서울 강북구 우이동 북한산 밑 봉학각 내에 안장되었다.
자손으로는 딸이 5명 있고, 셋째 사위는 소파 방정환 선생이다.
손병희 선생 유허지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생이 태어난 생가는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초가집으로 원형 그대로 보존하였으며 1961년 탄신 100주년을 맞아 유허비를 건립하였다. 또 충북 청원은 예로부터 의암선생과 함께 민족정기를 세운 분들이 많이 배출된 곳이기도 하다.
이번 문화탐방은 의미 있게 우리의 문화유산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이흥섭 실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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