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사조’통해 수필 ‘시집은 눈물인가’ 신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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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사조’통해 수필 ‘시집은 눈물인가’ 신인상 수상
  • 천성남 기자
  • 승인 2012.07.12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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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남씨(한국문인협회 보은군지부회원·보은신문 실버기자)
‘고추당초 맵다 한들 시집살이 더 매우랴’. 꽃다운 나이 갓 스무 살에 시집와 아이 낳고 살림하며 남편 뒷바라지해온 인고의 세월. 그 세월의 깊이만큼이나 손등에는 주름도 굵게 잡혔다. 올해로 75세. 언제부터인가 글이 너무 좋아 수없이 종이에 휘갈겨 쓰며 밤이 깊도록 책을 끼고 앉아 스무 살 처녀의 그 꿈으로 글을 써댔다. 읽고 또 읽을수록 먼발치만큼의 꿈들이 새싹처럼 돋아나 초로인생에서 영예를 안겨준 한 편의 수필로 거듭났다. 그 주인공은 김충남(75·내북면 동산리 출신)씨로 이번 문예사조 7월호를 통해 수필 ‘시집은 눈물인가’로 신인상의 영예를 안았다.

◇방년 20세 중매로 결혼 1남5녀 낳고 키운 인생이력서
‘어린 나이에 시집가라니까 시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시절, 알지도 못하고 한 번도 만나본 적도 없고 사는 곳이 어딘지도 모른 채 그냥 집안 어르신이 정하시고 하자는 대로 따라 시집을 갔다...중략...‘ (문예사조 7월호 신인상 수상 작품 중에서)

20세 때 인척의 중매로 결혼하여 1남 5녀를 키우고 겪어 온 파란만장한 희로애락의 역사를 잔잔하고 애절하게 써왔던 곳이 바로 내북면 동산리였다.
그는 아버지를 일찍 여윈 탓에 홀어머니 밑에서 남들처럼 배우고 싶은 공부도 못했고, 가고 싶었던 교회마저 다닐 수 없었다.
그의 나이 15세 때, 혈혈단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북면을 떠나 서울로 야심찬 탈출을 감행했다. 서울로의 무작정 상경이었다.
배우고 싶은 공부, 교회, 선망의 대상들이 탈출의 이유였고 그래서 서울 당숙아저씨의 그늘을 밑천 삼아 직장생활을 하며 야간중학교를 다녔다.
“당시는 왜 그리도 못 다했던 공부도 해보고 싶고, 교회도 다녀보고 싶고, 예쁜 옷도 입어 보고 싶었던지 정말 모르겠어요.”

◇서울 상경 접고 부부 연 따라 내북면 창리에 거주
인생은 새옹지마라 했나. 그나마 여유라고 생각했던 주변 사정이 당숙아저씨의 점포 화재로 낙하하여 그는 돌아온 탕자처럼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와보니 벌써 친구들이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시집가고 없더라구요. 저만 남아 혼기를 놓칠 새라 노심초사인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딱 한번 선 보고 곧장 시집을 가게 되었지요. 독실했던 기독교 집안이었던 시댁인 내북면 창리로의 인연을 맺게 된 겁니다. 그곳에 세워져 있는 주성교회가 바로 시아버님이 재건하신 교회입니다. 지금도 그 기념비에는 선교사 분과 나란히 ‘이봉기 장로님’ 이라고 이름 석 자가 고이 새겨져 있어요.”

◇당시 동산새마을 유아원 개원 마을아이들 도맡기 10년
“너무도 가난했던 시절, 지금처럼 위화감도 느끼지 못했던 그런 시절이었어요. 당시는 아이들이 왜 그리 많이 넘쳐났는지 지금과는 사뭇 그림이 달라요. 골목마다 아이들 노랫소리로 가득 찼던 시절이었지요. 아이들을 많이 낳다보니 오죽하면 시어머니와 아이를 낳는 시점이 같아 우리 첫딸과 다섯째 시동생과 동갑이고, 둘째 딸과 막내 시동생 또한 동갑이요.”
그가 27세였던 1960년대 국가차원의 국민재건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을 때 그는 부녀회장을 맡게 됐다.
“박정희 대통령의 특혜로 주어졌던 농협부녀회장 자리였지요. 대략 100여명 정도가 되었어요. 6년 정도 다니고 살림이 어려워 퇴직을 했어요. 견딜 수 없는 상황이었지요.”
1980년, 그는 골목에 넘쳐나는 아이들을 한 장소에 모아 돌보아 주기 시작했다.
1년 후 동산새마을유아원이란 인가를 받았다. 35평의 유아원을 국가 지원으로 지어놓았다.
“10년 정도 지나자 점점 줄어드는 농촌인구의 감소로 폐원을 할 수 밖에 없었어요. 현재는 이 건물이 의료기를 갖춘 건강센터이자 사랑방으로 운영되고 있지요.”

◇부녀회장으로 새마을포장 농수산부장관상 훈장 서훈
당시 근면, 자조, 협동이란 슬로건 아래 마을 부녀회장을 열심히 한 덕에 새마을 포장인 농수산부장관상의 서훈을 받았다.
“당시는 여성이 장관 서훈을 받은 것은 최초라고 들었어요. 당시 남자 분은 작고한 김월련(보은읍사무소 퇴직)씨 등 3분이 계셨어요. 그런 인연으로 현재 새마을 서훈지도자회장을 맡고 있어요. 당시엔 상 사업비를 지원받아 진입로포장 할 때 시멘트를 하사받고 유아원 뒤 옹벽을 쌓는 등 많은 일을 하여 성취감도 나름 컸었어요.”

◇당시 적십자봉사회원으로 소년소녀가장과 일대 일 결연
“본격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2000년 넘어서였어요. 특히 ‘보은신문 실버기자’를 하게 되면서 시나 수필, 일기 등 많은 글들을 쓰고 접하게 된 것 같아요. 당시 보은신문 창간호에 글을 실은 적도 있구요. 최근에도 기사가 나가면 서울이나 청주에서 글 잘 보았다고 감사의 전화, 문자를 주시는 출향인들이 많아요. 그게 이 나이 먹고 누리는 호사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는 뒤늦게 ‘문예사조’로부터 한 편의 수필을 더 보내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그게 바로 ‘낳은 정 기른 정’이다.
그 사연인즉, 지금은 작고한 박인자 회장과 현복순 회장, 회원 33명이었던 당시 적십자봉사회(현 보은군여성단체협의회)원으로 활동했을 당시 어린이날을 맞아 소년소녀가장들과의 일대 일 결연이 이뤄졌다.

◇소년소녀가장과 결연 맺고 둘째아들 된 행복한 사연들
“그때 만났던 아이, 지금은 둘째아들이 된 그 아이는 서울에서 결혼하여 자식 낳고 사업하고 잘 살죠. 늘 저의 기쁨입니다. 가장 허약했던 아이가 다니던 고등학교를 접고 자퇴를 하던 날 너무 힘이 들었어요. 그 아이는 그 후 서울로 갔어요. 우여곡절 끝에 한 금방의 종업원으로 취업을 하여 열심히 하다 보니 지금은 모든 것을 인정받아 자기 사업을 하고 있어요. 며칠 후 서울에 가서 그 아이를 만날 것을 생각하니 무척 기쁩니다. 그런 일기 성격과도 같았던 가슴에 남은 이야기를 써낸 것이 바로 ‘낳은 정 기른 정’입니다.”
예전 같지 않게 점점 글씨가 멀어지고 희미해지는 것을 호소하던 그는 요즘 안과 신세를 자주 진다.

◇인생의 치유단계, 매일 글 쓰는 행복이 지속되길 염원
그동안 많은 질곡의 삶 속에서 얻어진 치유의 은혜로 다가온 글 쓰는 행복이 지속되기를 그는 늘 염원한다.
1남 6녀를 모두 시집 장가보내고 난 후 오는 인생의 쓸쓸함을 그는 남편 이종덕(76)씨와 함께 글을 쓰며 행복으로 바꾸는 작업에 몰두 하고 있다.
“글 쓰고 있을 때가 마냥 행복하다”는 그는 보은도서관에서 열리고 있는 노인층 대상 ‘수필쓰기 문학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천성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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