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찾아오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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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찾아오던 날
  • 김정범 내북면 노인회장
  • 승인 2012.03.15 16: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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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날씨가 좀 춥다 싶더니 오늘은 햇살이 따사롭다. 가만히 창문 두드리는 소리가 있어 창문을 여니 봄이 미소 지은 얼굴로 서있다. 반가운 마음에 창문을 활짝 열고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하니 금새 방안을 가득 채운다. 예전에 비해 좀 늦은 것 같아 왜 늦었느냐고 물으니 산골짝 응달 한쪽에 남아있는 겨울의 발자취를 지우고 오느라고 늦었단다. 그리고 개울가 버들강아지 꽃망울을 틔우고 사래긴 보리밭 파란 이랑 길을 따라 오려 했는데 그 길이 보이지 않아 벌판을 헤메이다 새 길을 찾아오느라고 늦었다고도 한다. 손수레나 달구지 덜컹이던 좁은 길이 넓혀지고 그 길을 아스팔트로 포장하면 경운기 트랙터 그리고 자동차도 달릴 수 있어 사람들은 다니기가 좋겠지만 아마도 봄이 내 집을 찾아오는 길은 산기슭 타고 비스듬히 뻗혀 있던 옛날의 사래 긴 보리밭 길이 더 좋았었나보다 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자 마치 그 잘못이 내게 있는 양 미안한 마음에 녹차 한잔을 내놓으며 편히 쉬었다 가라 하였더니 이미 남쪽 산수유 숲에서 대접을 받고 왔노라 며 이내 동무들이 와서 오래 머물 터이니 그들과 함께 이야기하라며 떠날 채비를 하고는 소슬바람을 부른다.
그렇다, 기다리던 봄의 전령이 내게 찾아 온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의 품속처럼 포근한 느낌, 그리고 입맞춤처럼 감미로운 여운이 먼 산마루 까지 이어지고 있다. 동심이 되 살아난다. 얼른 머리맡 책상에서 하모니카를 꺼내 어릴 적 즐겨 부르던 노래를 불어본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 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나는 흰 나리 꽃 향내 맞으며 ∼∼∼”
옛날 시골 아낙이나 처자들이 그러 했듯이 막내 누님도 이 때 쯤 이면 보리밭 사이로 다니며 봄나물을 뜯으러 가곤 하였는데 그 때는 언제나 어린 나를 데리고 다녔다. 어떤 때는 따라가기가 싫어서 울 때도 있었지만 누님은 억지로라도 데리고 다니면서 부르던 노래가 바로 이은상님이 시를 쓰고 박태준님이 곡을 붙인 “동무 생각” 이었다. 그러기에 나도 자연히 따라 부르게 되었고 후에도 즐겨 부르게 되어 나도 모르게 애창곡이 되어 버렸다.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지만 한때는 노랫말 중에 동무라는 말을 친구로 바꾸어 부르기도 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동무라는 아름다운 우리말을 북쪽 사람들에게 빼앗겨 이념적 단어가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싶기도 하지만 이제 소슬바람을 타고 떠나는 봄빛이 그곳에 가면 그곳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따뜻하게 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부탁도 해 본다.
그러고 보니 그 누님이 보고 싶어진다. 가끔은 전화로 안부는 듣고 있지만 그래도 건강 상태는 어떠신지 내일이라도 한번 찾아뵙고 이 노래를 같이 한번 불러 보아야겠다.
시간 사이사이로 아직은 찬 기운이 시샘하듯 방안을 엿보기도 하지만 창문을 닫고 싶지가 않다. 조금 있으면 창 넘어 빈 밭에서 돋아날 새싹들이 보이고 개울의 물소리가 들리고 앞 산 에서의 나무들이 기지개 켜는 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옛날 만들어 불던 버들피리 소리도 들리고 소꿉동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도 들린다. 봄이 부른 소슬 바람에 어머니께서 끓여 주시던 냉이 국 내음새도 실려 온다.
문득 아내를 불러서 냉이가 돋았겠느냐고 물어 보았다. 왜 갑자기 냉이 타령이냐고 하면서도 싹이 많이 나오지는 않았어도 뿌리는 살아 있으니 쉽게 알아 볼 수는 있을 것 같다는 대답이다. 갑자기 마음이 급 해 진다. 아내에게 냉이를 캐러 가자고 재촉하며 호미를 들고 나섰다. 그러나 이런 일에는 아내가 더 전문가이기에 아내의 도움이 필요하여 어쩔 수 없이 도움을 청하였으나 아내도 흔쾌히 앞장을 선다. 급한 마음에 나서기는 하였어도 해 보지 않은 일이라서 그저 막연할 따름인데 아내는 이미 어디에 가면 냉이가 많은지 알고 있는 양 거리낌 없이 앞서 간다. 집에서 그리 멀지않은 조그만 빈 밭, 아직은 추수한 잔해들이 널려 있기는 하지만 아내는 해마다 여기서 냉이를 캤다고 하면서 바구니를 내려놓는다. 내 눈에는 잘 보이지를 않아서 냉이가 어디 있느냐고 하였더니 이게 냉이가 아니고 무어냐며 호미로 여기저기를 가르킨다.
얼마 후 나보다도 아내의 수고로 꽤나 많은 냉이가 바구니에 담겨졌다. 향긋한 내음이 나를 감싸준다. 봄빛이 온 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 같아 숨을 마음껏 마셔본다. 보리밥에 냉이 국을 곁들여 먹을 저녁 식탁을 생각하니 어린아이처럼 즐겁다. 그리고 지금 우리 내외의 등에 내려앉은 햇살만큼이나 마음도 여유롭고 따뜻해진다.
/김정범 내북면 노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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