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이렇듯이 집중호우가 쏟아지면 보은지역 대부분의 주민들에게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장맛비 추억’이 있다. 가깝게는 98년, 80년의 대홍수와 멀리는 일제 강점기 때인 33년 발생한 폭우사태다.
1933년 7월2일자 동아일보 호외를 보면 당시 우리나라 남도는 폭우로 인해 엄청난 수해가 발생했고 ‘보은(報恩)도 수난(水亂)’이라는 보은 발 기사가 실렸다. 원문 내용에 따르면 ‘보은지방에는 지난 달 26일부터 비가 나리어 30일에 잠간 개엇다가 또 7월1일부터 비가 오는 중이므로 장마비가 언제나 개일는지 알 수 없다 한다. 지리한 이번 비로 말미암아 보은의 교통은 사방으로 두절되엇다’고 보도했다.
또 80년 보은 대홍수 발생당시 매일경제신문 1980년 7월23일자 1면 ‘중부 폭우로 재산피해 200억’이라는 기사에는 ‘22일 상오 중에 100~150mm가 집중적으로 쏟아져 피해를 더욱 크게 했는데 충북 보은읍은 상부에 있는 장유저수지 둑이 무너져 내리는 바람에 읍 전체가 3시간 동안 물속에 잠겼고 급류에 휩쓸려 24명이 사망 또는 실종됐으며 54명이 부상하는가 하면 읍민 2,360가구 1만3,000여명이 모두 이재민이 됐다’고 보도했다.
장마가 끝난 7월28일에는 최규하 대통령이 승용차 편으로 보은군청에 들러 김종호 충북지사 등으로부터 수해상황과 복구추진현황을 직접 보고받기도 했다. 특히 당시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의 무소불위(無所不爲)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12.12 쿠데타 주역 전두환 국가보위상임위원장도 수해지역 시찰을 나왔었다. 이 때 김 지사는 수해관련 응급대처 상황 보고와 기관지 등을 활용해 확실한 눈도장(?)을 찍어뒀던 것으로 알려진다. 아무튼 전 대통령의 5공이 출범하면서 김 지사는 내무부 차관으로 전격 발탁되어 이때부터 승승장구 출세가도를 달리게 됐다.
그 이듬해 9월1일에는 호우에 이어 태풍 애그니스가 접근하면서 보은에는 또 비상이 걸렸었다. 당시 경향신문에는 ‘지난 해 7월 수해악몽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다시 수마가 할퀴고 지나간 보은군은 수해당일인 30일 새벽 3시부터 관내 전공무원을 비상소집하고 긴급복구에 들어갔다’고 보도했다.
중국 춘추시대 진(晉)나라 사마 위강(司馬魏絳)의 언행에서 유래된 유비무환(有備無患)이란 성어가 있다. ‘평안할 때 위기를 생각하고(居安思危) 대비를 하게 되면(思則有備) 근심이 사라지게 된다(有備則無患)’는 뜻이다. 비만 오면 수해가 발생했던 보은군에 이번에는 장대비가 주야장창 내렸음에도 피해가 거의 없다. 이는 군내 전 공무원과 관련 기관 종사자의 평소 유비무환 자세 때문이라고 본다. 미리 준비하면 어려움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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