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마을 이야기(95)-마로면 소여2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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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마을 이야기(95)-마로면 소여2리
  • 보은신문
  • 승인 2007.04.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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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 재배로 유명했던 마을
주변에 인근 마을 하나 없이 깊은 산골에 1리와 2리 두 마을만이 이웃하고 있는 소여리.
마을에는 탄부행 시내버스가 하루 네 번 왕래를 한다.

기대리에서 소여리로 접어드는 포장길은 인근에 다른 마을이 하나 없어 소여리 주민이나 마을에 볼 일이 있는 사람들만 이용을 한다. 그래서 인지 가끔씩 오가는 낯선 차량을 볼 때면 누구네 집에 무슨 일로 왔을까 궁금할 법도 하다.

마을은 농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마을 앞 논은 모내기 준비로 논갈이가 다 되어 있었다. 배나무 밭에는 나무마다 활짝 핀 하얀 배꽃이 제 모습을 자랑한다.

지금은 여느 농촌 마을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이지만 소여 2리는 광산이 있었던 마을이다.
지난 83년 폐광되기 전까지 외지인들이 마을에 들어와 70년대 초반부터 석탄을 채취하는 광산을 운영했다.

300여명의 직원들이 근무했던 소여탄광은 문경, 태백에도 탄광이 있어 다른 지역에 근무하던 직원들이 소여탄광으로 발령을 받으면 본인만 오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이 함께 왔기 때문에 80년대만 해도 소여리 탄광 근처에 4단계로 산을 깎아 지은 사택이 즐비해 하나의 단일 마을이 형성됐을 정도였다.

서너 명의 마을 주민이 광산에서 일을 하긴 했지만 외지인들이 운영하고 있었기에 마을 주민들의 수입과는 거리가 멀었다.

광산이 폐광되고 외지인들은 그곳을 떠났지만 주민들은 지금까지 마을을 지키며 땅을 일구고 살아왔다.

다량의 석탄을 채취한 광산이 남기고 간 피해를 주민들만 고스란히 입게 된 것이다.
폐광이 된 지 20년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47가구 100여 명의 주민들은 지금도 몸살을 앓는다.

본래 탄부면 지역으로 소여 또는 소니라 불렀으나 1914년 상소리와 중소리, 하소리를 병합하여 소여리라 하고 마로면에 편입돼 동쪽의 안뜸과 가새뜸은 1리로 양지말로 불리기도 하는 큰말은 2리로 분리되었다. 소여2리는 큰소여와 작은소여(작은소)로 나뉘는데 작은소여에는 3가구가 생활하고 있다.

소여2리 마을 봉사자로는 안광두(61) 이장과 양복열 노인회장, 유경옥 부녀회장, 김진욱 새마을 지도자가 있다.

# 마늘로 유명했던 마을
마늘을 재배해서 번 돈으로 자식들 대학 공부를 시켰을 만큼 소여2리 주민들에게 마늘은 좋은 소득 작물이었다.

특히 토양에 석회질이 많아 마을에서 재배되는 육쪽 마늘은 품질이 우수하기로 유명했다.
마을 주민 중 마늘 농사를 안 짓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으며 적게는 2000접, 많게는 5000접까지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마늘 수확기에는 영동, 음성 등지에서 10여 명이 넘는 장사꾼들이 가격을 흥정하기 위해 마을에서 숙식을 하고 마늘을 사갈 정도로 소여2리 마늘은 인기가 대단했다.

그러나 마을 전체 주민들의 주 생산물이었던 마늘은 광산으로 인해 땅의 수분이 부족해지면서 재배를 못 하게 되어 판매는 고사하고 돈을 주고 사먹어야 하는 형편이 되었다.

정작 원 주민인 소여2리 사람들은 광산이 생겨도 득 되는 것 하나 없이 마늘 재배로 목돈을 만지게 해준 좋은 토양마저 잃고 말았다.

현재 소여2리의 주 작물은 고추 위주의 밭농사와 벼농사가 대부분이며, 한때는 배 농사를 짓는 농가가 15가구나 되었으나 판로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라 작물 전환을 하고 지금은 안광두 이장을 포함해 4가구만이 배를 재배한다고 한다.

그리고 외딴 곳인 작은소에 있는 3가구가 젖소를 사육하고 있다.

# 먹을 물을 걱정해야 하는 주민들
수도꼭지를 틀기만 하면 맑고 깨끗한 물이 콸콸 잘 나와 아무런 불편 없이 밥을 짓고, 세수를 하고 빨래를 했다. 가끔은 먹을 물이 없어 고생하던 아프리카 어느 부족을 떠올리며 평소보다 물을 아껴 쓰기도 한다.

이제는 아프리카 부족이 아닌 소여2리 주민들을 떠올리며 물을 아껴 써야 할지 싶다.
수질이 안 좋아 물이 뿌옇고, 수량이 적어 물이 달려 주민들마다 물 걱정이 태산이다.
주민들이 이런 식수난을 겪는 데는 광산이 원인이라고 한다.

폐광된 지 한참이 지났지만 마을 주민들에게 광산은 여전히 골칫거리이다.
폐쇄된 지하의 빈 갱도로 물을 빼앗겨 농업 용수는 물론 식수 공급마저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소여2리는 탄광 사업으로 인해 지하수 수질이 나빠 아무 곳이나 관정을 굴착할 수도 없는 난맥상을 가지고 있는 마을이다.

그렇다 보니 몇 번의 관정으로도 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주민들이 아직까지 고통을 겪고 있다.

물 사용량이 증가하는 명절 때는 마로면사무소에서 식수를 공급해주고 있는 실정이다.
동네 아주머니가 수도에서 쏟아져 나오는 뿌연 물을 보여주며 이런 물을 먹으니 사람이 건강할 수 있겠냐며 물로 인한 애로사항이 보통이 아니라고 호소했다.

안광두 이장은 군에서 기대리에 있는 현 군수 소재의 땅에 관정을 해 수질 적합 판정을 받았지만 아직 예산 확보가 안 돼 시설 설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했다.

주민들이 안정적인 식수를 공급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관계 기관의 노력이 좋은 결과를 가져와 물 문제로 고통받는 주민들의 시름을 덜어주었으면 한다.

광산이 생기기 전에는 도랑물이 맑아 가재와 새우도 많고,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먹던 우물이 마을 안에 4개나 있었다.

옛날에는 어느 마을이나 다 그랬다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광산으로 인한 피해를 주민들이 참아낸 세월이 너무 눈물겹다.

폐광 이후 경지정리가 됐지만 모내기를 하기 위해 논에 물을 대면 물이 땅 밑으로 빠져 3일을 안 간다고 한다.

마을 앞에 있던 참샘은 물이 깊고 풍부해 예전에는 그 물로 농사까지 지었는데 물이 다 빠져버리고 지금은 경지정리로 매워져 찾아볼 수가 없다. 참샘이 있었더라면 그 물을 식수로 사용할 수 있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만 남는다.

들녘을 바라보는 주민들의 눈에 마을 물을 빼앗아 간 땅 속 깊은 곳 물에 찬 갱도가 자꾸 보이진 않을까 걱정이다.

# 왕래(旺來)재 넘어 관기로 왕래
왕래재는 소여2리에서 송현리 웃솔고개로 넘어가는 산고개이다.
1361년 고려 공민왕 10년에 두 번째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그 해 11월 18일 서울인 개경을 버리고 경상도 복주, 즉 오늘의 안동으로 피난을 하게 되었다.

이듬해 공민왕이 안동에서 상주로, 상주에서 청주로 가는 길에 이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왕래재를 넘어 주민들은 보리쌀이며 마늘을 팔러 관기장에 다니고, 학생들은 학교를 다녔다.

기대리 쪽으로 돌아가면 거리가 너무 멀어 산길이라 험하긴 해도 거리 상으로 반도 더 가깝다 보니 왕래재를 넘어 다녔던 것이다.

아이들의 경우 8살 난 초등학교 1학년생이 고개를 넘기에는 힘이 들어 어른들이 2,3년 학교를 늦게 보낼 정도였다.

그래서 관기초등학교를 졸업한 안광두 이장도 같이 졸업한 동기들 보다 나이가 더 많다고 했다.

이제는 교통수단이 좋아 기대리로 이어진 한적한 포장길을 멀리 돌아다니지만 주민들은 왕래재에 서린 추억들을 저마다 하나씩 안고 살아간다.

어버이날이 돌아오면 외지에 나가 있는 젊은 출향인들로 구성된 고향계 회원들이 고향을 방문한다고 한다.

부부가 함께 찾아와 내 부모뿐 아니라 마을 어른들께도 어버이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주고 맛있는 음식도 장만해 식사 대접도 하고 있다.
가슴 아픈 주민들의 사연을 듣고 난 뒤 마음을 달래주는 따뜻한 소식이었다.
자식 농사 잘 지었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주민들의 오랜 숙원인 식수난이 조속히 해결돼 소여2리를 다시 찾을 때는 시원한 냉수를 한 대접 얻어 마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

김춘미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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