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황토 밤고구마 재배지로 유명한 사직리
옛 보은현감이 관할하던 사직단(社稷壇)이 새말 뒷산에 있어 토지신과 곡신에 춘추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로 인해 마을 이름도 사직으로 쓰게 되었다고 한다.또 마을 자랑비에는 마을에 한문 서당이 있어 공부하는 선비들이 각처에서 모임으로 선비의 강직성을 강조하는 뜻에서 사직(士直)이란 동명으로 오늘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강직한 선비정신이란 뜻을 품고 있는 사직리(士直里)
좌청룡, 우백호 산줄기가 큰말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뻗어 내려 마을을 지켜낸다.
자연마을로는 사직리의 중심이 되는 큰말과 지금은 폐교가 된 사직초등학교가 있던 새말 그리고 구름샘이가 있다.
마을 앞 넓은 들녘은 대전 쌀장사들이 전부 사직쌀을 살 정도로 유명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전에는 사직 저수지가 있었지만 내속리면 삼가저수지 축조로 현재는 없어지고 논으로 변했다고 한다.
65가구의 주민들이 생활하는 사직리 마을 봉사자로는 임점수(60) 이장과 박봉하(76) 노인회장, 안복순(59) 부녀회장, 이춘태(54) 새마을지도자가 있다.
# 보은의 자랑인 황토 밤고구마 재배
농산물을 생산하는 농업이 기반인 농촌에서 그 지역이 내세울 수 있는 특산물이 있다는 건 지역민 모두에게 큰 자랑이 아닐 수 없다.
황토 사과나 배, 대추와 같은 과일이 지역 특산물로 알려진 보은에는 또 하나 유명한 재배 작물이 있다. 그것이 바로 탄부면에서 생산되고 있는 황토 밤고구마다.
탄부면 사직리를 중심으로 생산되고 있는 황토 밤고구마는 탄부면에서도 사직리가 생산량의 80∼90%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36농가가 고구마 작목반(반장 이광식)을 구성해 운영할 정도로 사직리에서 고구마는 주된 소득원으로 자리잡고 있다.
사직리가 황토 밤고구마 재배지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은 마을 주민인 김정학씨의 남다른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정학씨는 대전에서 밤고구마 종자를 구할 수가 없어 남의 용달차를 빌려 일본에서 들여온 종자로 전국에서 최초로 밤고구마를 재배하고 있던 전라남도 해남까지 직접 가 밤고구마 종자를 구해와 심었다고 했다.
김정학씨를 선두로 재배되기 시작한 밤고구마는 농가 소득면에서 좋은 수입원이 돼 재배 농가의 증가로 현재 사직리에서 재배되고 있는 고구마가 2만 7000여평에 달한다.
한 개인이 재배하기 시작한 고구마는 3년 후 한집 두집 재배 농가가 늘어나 이제는 사직리를 대표하는 소득 작물로 유명세를 떨쳐 해마다 방송국에서 나와 취재를 해갈 정도라고 한다.
다른 작물에 비해 노동력이 덜 들고 평당 소득률도 벼농사보다 높아 주민들에게는 고구마가 좋은 재배 작물이 아닐 수 없다.
사직리 고구마는 양질의 황토밭에서 생산돼 다량의 황산칼리를 함유하고 있으며, 당도가 높고 그 맛이 뛰어나 10여 차례나 도 및 중앙 농산물품평회에서 입상한 적도 있다.
특히 지난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는 김정학씨가 직접 재배한 밤고구마를 5년 간이나 청와대에 진상할 정도로 품질의 우수성이 인정되었다.
토질과 기후가 적합해 품질을 인정받아 서울 등지에서 호평을 받고 있으나 판로의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전에는 농협을 통해 계통출하를 하기도 했지만 가격대가 안 맞아 지금은 개인출하를 한다고 했다.
그동안 쌓아올린 사직 밤고구마의 인지도가 높아 다행히 작년에는 전량 수매할 수 있었다. 판로 개척은 농가가 스스로 해결해야할 그들만의 몫은 아닐 것이다. 농가와 기관, 정책이 서로 연계해 농가소득 외에 지역 홍보 등 더 많은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하다.
사직리 고구마 작목반원들은 과수농가에 비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만한 지원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안타까운 심정을 내비쳤다.
고구마 박스가 일부 지원되고 있긴 하지만 자재 지원이 시급하다는 입장이다.
고구마 선별기를 소지한 농가가 한 가구도 없어 모두 수작업으로 선별, 포장하기 때문에 인건비가 많이 들고, 노령화로 인한 노동력 감소 문제가 발생해 기계화가 하루빨리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품질 향상을 위한 선진 기술 보급도 요구되고 있다.
김정학씨의 경우 작년에 처음으로 터널재배를 시도해 노지 재배보다 2주 가량 앞서 고구마를 수확해 조기출하로 일반 노지 재배보다 더 높은 수익을 올렸다고 한다.
수확량은 떨어지지만 판매가격 등을 고려하면 터널재배가 소득이 높아 올해는 다른 작목반원들도 참여해 터널재배로 고구마를 재배하는 농가가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 강직한 선비정신 숨쉬는 곳
사직리 유래비는 "오랜 그 옛날에는 장터거리 시장이 섰고 광대산은 광대들의 놀이터라는 전설로 보아 이 지방이 찬란한 문물의 중심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옛 어른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마을에 장이 섰고 광대산은 광대를 불러다 놀이를 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워낙 오래 전의 일이어서 인지 마을 어른들도 말로만 들었을 뿐 실제로 보지는 못해 그때의 생활상이 어땠는지 들어볼 수 없어 아쉬움으로 남겨야 했다.
사직리는 1957년 4월 1일 사직초등학교가 설립되어 탄부면 서부에 초등교육의 중심지가 되었고 주민들의 교육열 또한 왕성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면소재지 인근의 탄부초등학교가 위치해 있는 덕동1리와는 좀 멀다 싶게 떨어져있어 탄부면 서부 지역 학생들을 위해 사직리에 초등학교를 설립하였다.
폐교되기 전 학교가 운영될 당시에는 마을이 100호가 넘었으니 사직리의 초등학생 수만 해도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았을 것이다.
그 학생들 중 많은 이들이 15대 국회의원이었던 어준선씨와 청주지방법원 어수용 부장 판사를 비롯해 박사, 경찰, 공무원 등 다양한 분야에 진출해 마을에 명예를 더해주고 있다.
마을에는 어준선 전 국회의원의 조부인 성암 어영우 선생의 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이 유적비는 지난 78년 성암 선생의 문하생들이 세운 것으로 선생은 일찍이 학문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학당을 열고 후학을 양성한 선각자로 알려지고 있으며 마을에서는 해마다 봄이면 길일을 택해 춘향제를 올리기도 했다.
사직리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된 것이 이 같은 성암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았기 때문은 아닐까 잠시 생각해본다.
3년 전에 지은 건강관리실은 마을에서 마련한 운동기구며 건강기구들이 비치돼 있고 찜질방, 목욕탕, 화장실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주민들이 편리하게 애용하는 곳이다.
격일로 남자와 여자가 돌아가면서 하루씩 사용하는데 읍내 목욕탕을 굳이 가지 않고도 건강관리실을 이용해 건강관리며 찜질, 목욕까지 할 수 있어 주민들이 번거로움을 덜게 되었다.
사직리는 25년 전 탄부면에서 처음으로 주민들이 경로당을 건립한 마을이라고 한다. 매화리의 서부 지역 경로당이 사직리 경로당 보다 앞서 지어지긴 했으나 군 지원 없이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자비를 들여 지은 것은 사직리가 최초였다.
그 후 경로당을 다시 건립 그때 지은 건물을 지금까지 이용하고 있다.
건물이 오래돼 보수 공사를 하는 등 수리를 했어도 공간이 좁아 주민들이 마을 회관 겸 경로당으로 사용하기에는 불편이 따른다고 한다.
큰말 앞 광장 한편에는 주민들이 자주 찾는 건강관리실과 경로당이 있다. 그리고 폐허가 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까지 싸늘해지는 유아원으로 사용되었던 지은 지 오래된 낡은 건물도 있다.
건물 외벽에는 '사직리 새마을 유아원' 이라고 써놓은 글씨가 아직도 희미하게 남아 있어 그 건물이 유아원으로 사용된 건물이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사용하지 않은 지 벌써 20년이 넘었지만 행정상의 문제로 건물 철거가 어려워 지금껏 방치된 채 주민들의 속만 태운다. 다른 곳도 아니고 마을 입구에 그런 건물이 있다보니 미관을 해쳐 유아원 철거 문제가 조속히 해결되길 주민 모두가 바라고 있다.
주민들의 입장을 고려해 행정적인 문제가 잘 해결된다면 유아원 건물 자리에 마을회관을 지었으면 하는 주민들의 바람도 이루어질 것이다.
20년을 기다렸다.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닌 듯하다. 건물의 깨진 유리창이 주민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아 씁쓸함이 진하게 전해져왔다.
1백 20여년 마을을 지켜온 팽나무. 그 위풍당당함은 오늘도 변함이 없다.
맛있는 보은황토 밤고구마를 재배하는 사직리의 명성이 몇 백을 이어가는 긴 생명력으로 멀리 뻗어나가길 기대해본다.
김춘미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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