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북면 중앙리(76)-옛 회인현의 발자취가 살아 숨쉬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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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북면 중앙리(76)-옛 회인현의 발자취가 살아 숨쉬는 곳
  • 보은신문
  • 승인 2006.12.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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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9일은 회인장이 서는 날이다.
중앙리를 찾은 지난 29일은 11월의 마지막 회인 장날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장사꾼들이 좌판을 벌이고 무, 생선, 젓갈, 과일, 양말, 옷, 머리핀 등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장날이라는 말만 들어도 괜스레 마음이 설레고 안 가보면 왠지 서운한 마음이 일어 발길을 향하는 사람들. 장 구경 나온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회북면은 원남장, 관기장 등 보은에서 아직까지 장이 서는 몇 개 안 되는 면소재지 중 하나이다. 예전에는 보은의 소전이 회인에 있을 정도로 사람 많고 먹을 거 많고 돈벌이도 잘 됐던 좋은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흥정하는 소리도 시끌벅적 사람들 오고가는 소리도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장날만큼은 뭔가 다르다.

앉을 자리 걱정 안 해도 될 정도로 한산했던 아침 버스는 발 디딜 틈도 없다. 꼭 출근길의 서울 버스 안 풍경 같다. 회인장이 보은장만 하겠냐만 중앙리의 장날은 김장철이어서 인지 평소보다 활기가 넘쳐 보였다.

이곳은 본래 회인군 소재지로 읍내면 관할이었으나 1914년 일제에 의해 군,읍,면이 통폐합 될 때 회인군을 보은군에 편입시키고 회남, 회북으로 분면하면서 마근동과 사동, 눌곡리와 평창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회북면의 중앙이 되므로 中央里라 하였다.

마을 중앙에는 보은(수리티재)-청주(피반령재)간 25번 국도가 지난다. 지금은 회인천 제방으로 우회도로가 생겨 차량 통행이 전에 비해 많이 줄었으며 도로를 중심으로 양편에 상가가 밀집해 있다. 서부통합보건지소 앞 중앙리 중간을 흐르는 망골천을 경계로 저자거리와 각 기관이 몰려 있는 말들, 회인 초등학교 앞 하마실, 보은에서 들어오는 마을 입구 쪽 옥도래 마을을 중앙1리로 사동을 중앙2리로 분리한다.

127호가 거주하는 중앙1리에는 농협, 새마을금고, 우체국, 회인초등학교, 회인지구대(파출소) 등이 있으며 98호가 있는 2리보다 상업에 종사하는 이들도 많았다.

중앙2리에는 면사무소와 회인중학교가 있으며 옛 회인현의 사직단이 있어 사잣골, 사직동이라 부르다가 사동이 되었다고 한다. 사직단은 해마다 정월이 되면 고을의 원님들이 토지신과 곡물신에게 친히 제사를 드려 그 해의 풍년과 고장의 평안을 기원하였던 곳으로 현재 회인중학교 뒤로 사직봉이란 산에 마련되어 있다. 지금도 군수와 면장 등 각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해마다 제를 올린다고 한다.

중앙1리는 금수봉 중턱에 있는 산제당에 중앙2리는 사직단 위쪽 사직봉에 있는 산제당에 정월 초사흗날 산제를 지냈는데 1리는 없어지고 2리는 산제와 수살맥이 제사를 함께 거행하고 있다. 수살맥이 제사는 면사무소 앞 마을입구(청주쪽)에 있는 거북바위에 올리는 것으로 이 거북바위는 둥근 석단을 쌓고 그 위에 올려놓은 거북이 형상의 자연석 바위다. 이것은 지금의 위치보다 조금 북쪽의 자연석 암반 위에 있었으나 도로확장으로 없어지게 되자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은 것이다. 북쪽 산줄기가 멈춘 곳인 옛날 거북바위가 있었던 터는 옛 회인현 여단으로 추측되기도 하는데 여단지란 돌림병을 예방하기 위해 주인 없는 외로운 혼령에게 제사를 지내주던 곳이다.

거북이는 길이 110㎝ 높이 49㎝로 자연석이라고 하기에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진짜 거북이와 생김이 거의 흡사하다.

중앙1리 마을 봉사자로는 우원길(59) 이장과 김형석(75) 노인회장, 장영숙(57) 부녀회장, 박희태(36) 새마을 지도자가 있다.

중앙2리는 윤정식(63) 이장과 우종수(73) 노인회장, 박연옥(43) 부녀회장, 여원일(47) 새마을지도자가 있다.

# 회인팔경
옛 백제시대부터 고을이었던 지금의 중앙리를 중심으로 회인팔경이 전해지고 있다.
회인현은 백제 때 미곡현(未谷縣)이었는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다음 경덕왕16년(757) 매곡(昧谷)으로 고쳐 연산군(지금의 청원군 문의)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 태조 23년(940) 회인(懷仁)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현종9년(1018)에 청주목에 예속되었다가 뒤에 회덕에서 파견된 감무가 관할하였다. 우왕9년(1383)에 따로 감무가 되었고 태종13년(1413) 현(縣)으로 승격되었다가 고종32년(1895)에 군(郡)으로 승격되어 읍내, 동면, 남면, 서면, 북면, 강외면 등 6면을 관할하였는데 1914년 군면폐합시 북면은 청원군에 붙이고 그 외는 보은군에 편입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지역의 뛰어난 풍광을 팔경으로 손꼽았는데 관동팔경이나 단양팔경처럼 회인에서도 팔경을 꼽고 있다.

회인팔경의 첫째는 아미반월(蛾眉半月)로 아미산성에 걸려 있는 조각달을 말한다.

중앙리 앞 보은에서 청주로 통하는 길목에 돌로 쌓은 산성으로 아미산성 또는 매곡산성이라 불리 우는 옛 성이 있다. 유물로는 무수한 신라의 토기 조각과 백제 계의 연질 토기 조각이 발견되어 이곳이 신라와 백제 국경의 빈번한 변동으로 주인이 자주 바뀐 곳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남계어화(南溪漁火)로 남쪽 시냇가, 즉 속칭 '밤샘'이라고 부르는 시냇가에서 밤 고기를 잡는 광경이다.

세 번째는 북수청풍(北藪淸風)으로 여름철에 북쪽에 있는 숲 속에서 불어오는 맑은 바람을 말한다. 북쪽의 숲은 회인중학교 앞에 있던 웃수머리를 가리키며 그곳은 현재 두 그루의 커다란 느티나무만이 남아 있지만 본래 하천 제방으로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빼곡했던 곳이라고 한다. 그러던 것이 80년 수해로 숲을 잃고 말았다. 이 숲 아래인 아미산 남쪽에 있던 숲은 '아래수꼬리'라 불렀다 한다.

두 그루의 느티나무 사이에는 팔각정을 설치해 주민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중앙2리는 주변 땅을 250여 평 매입해 마을 공원화 사업을 추진 중에 있다.

중앙1리 또한 주민뿐 아니라 시장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이용할 수 있도록 장터 쪽에 쉴 공간을 만들고자 부지를 마련했으며 팔각정을 세울 계획이라고 한다.

네 번째는 옥녀탄금(玉女彈琴)으로 옥녀봉에서 거문고를 뜯는 모습을 말하는 것으로 마치 거문고의 음율이 들리는 듯하다.

다섯 번째는 금수봉의 단풍, 금수단풍(錦繡丹楓)이다.

여섯 번째는 송정백학(松亭白鶴), 송정봉 소나무 가지에 하얗게 날아와 앉던 백학의 모양을 말하는 것이다.

일곱 번째는 사직단에 푸르게 우거진 소나무를 가리키는 사직취송(社稷翠松)이다.

회인중학교 정문에서 보면 학교 건물 뒤로 산에 소나무가 유달리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곳이 바로 사직단이 있는 곳으로 그전에는 소나무가 지금보다 훨씬 많았다고 한다.
끝으로 부수단하(富壽丹霞)는 부수봉의 붉은 아침 노을을 말한다.

# 지역 명소 가능성 높아
중앙리 장터 안쪽에는 회인 인산객사가 있다.
객사는 고려, 조선시대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것으로 관사 또는 객관이라고도 한다. 객사는 고려 전기부터 있었으며 외국 사신이 방문했을 때는 이곳에 묵으면서 연회도 가졌다. 조선시대에는 객사에 궐패(임금의 상징으로 '궐(闕)'자를 새긴 위패 모양의 나무 패)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예를 올리기도 하였고, 여행하는 관리나 사신들의 숙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객사의 배치형식은 정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익실(본체의 좌우편에 달린 방)을 두고 전면에는 중문, 외문, 행랑이 있는 것이 보통이나 회인인산객사는 정당과 외문만이 남아 있다. 1983년 해체보수 되었는데 대들보 아래 묵서명(墨書銘)에 의하면 1655년(효종6)에 중건하고 1803년(순조3)에 중수했으며 건물 이름이 '인산객사' 임이 밝혀졌다.

일제시대에는 초등학교 교사로 또는 면사무소와 예비군 중대 사무실로 사용하였으며 광복 이후에는 농촌지도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건물의 전체적인 건축기법으로 보아 조선후기의 객사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6호로 지정되었다.

하마실 마을 회인초등학교 앞에는 조선시대 회인현감이 거처하던 관아가 있다.

본체와 별채가 남아 있으며 현재는 개인이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객사가 문화재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는 것과 달리 관아는 세월이 흐른 뒤 그 모습을 잃게 될까 걱정하는 마음을 갖게 했다.

중앙리는 보은이 낳은 시인 오장환의 생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오장환 시인은 1918년 회북면 중앙리 140번지, 사잣골(중앙2리)에서 출생했다.

1924년 회인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1927년 경기도 안성 공립 보통학교로 전학, 휘문 고등 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33년 11월 조선문학지에 시 '목욕간'을 발표했다.

그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1937년 명치대학전문부 문예과 별과에 입학해 자오선 동인으로 활동하다 그 해 8월 첫 시집 '성벽'을 자비로 출판했으며 1947년 네 번째 시집 '나 사는 곳' 간행을 끝으로 1947년 10월에서 1948년 2월 사이에 월북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노후 된 채 방치돼 있던 오장환의 생가가 복원되고 오장환 문학관이 설립되면서 지역 명소 가능성은 더 높아졌다.

1996년 5월 처음으로 오장환문학제가 개최돼 올해로 11회를 맞았다.

오장환 생가 주변에 있던 중앙 2리 마을 회관은 근처로 자리를 옮겨 다시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오장환 생가와 회인 인산객사, 아미산성 등 중앙리의 문화 유적이 이곳을 지역의 명소로 부각시킬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한다. 지금부터 시작이겠지만 늦지 않도록 부지런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중앙리 전체가 관광지로 개발돼 상가가 번성하고 특색 있는 마을로 유명세를 떨칠 날은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

보은보다 전기가 먼저 들어오고, 회북면민이 만 명을 넘고, 회인초등학교 학생 수만 해도 천명을 넘었다. 회인초등학교는 어느새 개교 100주년을 맞았다.

옷가게, 미용실, 이발소, 정육점, 양조장 등 마을에는 없는 거 빼고는 다 있다. 예전에 비할 순 없지만 지금도 사람들은 중앙리에 가서 파마도 하고 농약도 사고 자장면도 사먹고 장도 본다.

여전히 회인으로 통하는 회북면 중앙리 주민들은 옛 회인현의 자랑스런 역사를 안고 자부심으로 살아가고 있다.

김춘미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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