象賢書院 廟定碑(상현서원 묘정비) 번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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象賢書院 廟定碑(상현서원 묘정비) 번역문
  • 보은신문
  • 승인 2006.0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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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기 형 / 외속봉비
보은 현 속리남쪽 수석이 청결한 곳에 祠齊(사제)가 있으니 김충암 선생, 성대곡 선생, 성동주 선생 조중공 선생, 송우남 선생을 享祀(향사)하며 일컬어 상현서원이라 한다.

가만히 생각건대 조선조에 있어 文治(문치)가 기묘년 간 보다 융성한 때는 없었는데 실로 김충암 선생이 조정암선생과 더불어 사림의 영수로써 비록 그 때의 숨겨진 이야기와 논의의 실마리를 찾아서 상고할 길은 없으나 國史(국사)와 野史(야사)에 전하는 것을 보고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은 타고난 기품이 맑고 깨끗하며 見識(견식)이 뛰어나고 말과 행동을 삼가는데 古人(고인)의 본을 받고 더욱 소학과 近思錄(근사록)을 독실이 믿으며 사색에 잠기어 학문의 깊은 뜻을 생각하여 탐구하며 조정에 나아가 벼슬에 올라서는 어려운 국사를 책임 맡아 최선을 다하고 유교를 부흥시키는 일을 자기의 임무처럼 삼아서 王道(왕도)와 覇道(패도)의 변론과 古今(고금)의 훌륭한 정치와 문란한 정치의 기미를 조심하고 삼가서 임금께 아뢰니 中宗(중종)임금도 귀를 기울여 받아 들여서 거의 이상정치가 일어나는 듯 하더니 마침내 훈구세력에 밀려 화를 면치 못하였으니 이것이 天運(천운)이던가!

그런데 지금에 학문을 논하는 자는 반드시 주자학을 근본으로 삼고 훌륭한 治世(치세)를 이야기 할 때는 반드시 요순정치를 으뜸으로 삼는다 그 밖의 異端(이단)과 공리지설을 입어 일이 낭패가 되니 조야가 모두 입을 다물었고 아마도 그 참회에 겁을 먹고 두려운 나머지 그 흔적조차도 세상에서 멀리하여 소멸되고 만 것이다.

그래서 그 행적에 대한 기록의 출처는 대략 선생의 동지들에 의해서 보존된 것에서 나온 것이다.

大哭(대곡)선생은 기품이 온화 청순하고 도덕과 학문이 높은 경지에 이르렀으나 그 명성이 세상이 드러나는 것을 꺼리어 자기의 본색을 숨기고 세속에 섞이어 속인처럼 행세했다. 그 풍모가 俗氣(속기)를 벗어난 고결함이 있고 세상 부귀영화의 부질없음을 초개와 같이 여겼다.

매양 기분 좋고 날씨 좋은 날에는 山水(산수)를 거닐며 거문고를 타고 시를 읊조리기도 하였는데 그 운치가 맑고 古雅(고아)하여 시원한 흥취를 자아내게 하였다. 그리고 經書(경서)에 침잠하여 유유 자적하여 의리를 완색하는 학문에 몰두하여 장차 늙음이 찾아오는 것을 잊고 있는 듯 하였다.

東주(동주)선생은 뜻이 크고 기개가 있어 大志(대지)를 품었으며 經書(경서)에 통달하였으나 과거를 보아 입신양명하는 일에는 뜻이 없었고 해학이 풍부하며 술을 좋아 했고 특히 邵康節(소강절)의 인격을 흠모하였다.

보은 현감으로 있을 때 때 도적의 습격을 당함에 백성을 가엾이 여기고 애달파 했으며 병사를 모아 도덕을 토벌하는데 앞장섰다. 관직에서 물러난 다음 죽었는데 군민이 선생의 유덕을 추모해 마지 않았으며 선생의 忌日(기일)에 반드시 제사를 지내며 제삿날에는 고을의 부녀자들이 고기를 먹지 않았다.

重峯(중봉)선생은 평생 학문을 함에 있어 스승의 학설을 독실히 따르고 오직 실천을 위주로 하였으며 목숨을 걸고 충효를 지키는 큰 절조를 지녔으니 계모를 지성으로 섬겨 마침내 그 마음을 감회케 하고 임금을 사모하고 나라를 사랑함이 지극한 정성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임금께 상소를 올릴때는 옳은 일이라면 극언으로 간하되 危禍(위화)를 헤아리지 않았다.

일본의 우두머리 풍신수길이가 우리나라에 길을 빌려 명나라를 치겠다는 모의를 해 왔을 때 선생은 일본의 사신을 목 베이라고 강력히 주장하였고 그 청이 임금께 상주되어 大義(대의)를 밝혔다.

그러나 마침내 임진왜란이 일어남에 의병을 모아 목숨을 버리고 의를 좇아 막중한 일을 내 한 몸에 맡기니 그 지극한 충성과 거룩한 절개는 日月(일월)과 더불어 그 빛을 다투더라. 그리고 이 같은 위업을 이룰 수 있던 까닭은 오직 학문의 공일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암선생에 이르러서는 벽립태산과 같이 우뚝한 자질로써 세상에 드믄 빼어난 인물이다. 侏子(주자)를 孔子(공자) 이후 일인자로 삼아 항상 자나 깨나 마음속에 간직하고 존신하여 학문에 탐익하여 침식을 잊었고 異端(이단)을 논박하며 그릇된 학설을 파헤치는데 이르기까지 모두 옛 성인의 법도를 따랐다.

丁卯(정묘)호란과 丙子(병자)호란 이후에 천지가 뒤집히고 의리가 무너지니 선생이 孝宗(효종) 임금으로부터 天理(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로 잡으라는 소탁을 받고 중요한 정사를 임금과 긴밀히 논의하고 일을 도모하는데 그 뜻이 금석과 같이 학고 하였다. 비록 일이 끝내 실현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大義)는 밝게 빛이 났으며 족히 백세에 기록될 만 하다.

그 도덕과 학문의 공적이 빛나고 탁월함이 아마도 모든 儒家(유가)의 학문을 집대성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무릇 다섯 분 선생은 그 시대에 있어 선후가 있고 그 자취가 드러나고 덜 드러남에 차이가 있고 도를 수립하고 덕을 이룸에 그 모양이 같지 아니함이 있으나 그러나 또한 그 족적을 달리하면서도 귀착되는 곳은 한가지로 돌아가는 것이니 후세에 五賢(오현)을 상논하는 자는 반듯이 이것을 알 것이다.

무릇 이 서원에 들어와서 사당에 오르는 사람은 진실로 알아야 할 것이니 충암 선생의 내 몸을 돌보지 않고 충절을 다한 일과 대곡 동주 서생의 청렴 고결함과 중봉선생의 죽음을 걸고 도를 지킨 일과 우암선생의 全體大用之學(전체대용자학)을 우러러 따르고 尊奉(존봉)하는 마음을 간직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충암 선생은 보은에서 출생하였고 일찍이 신妃(신비)의 복위를 청하는 상소를 올린 일로 보은에서 유배 되었으며 매양 속리산 두솔암에서 독서를 함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몰입하였다.

대곡선생은 속리산하의 대독에서 은거하다가 생을 마쳤다. 동주선생이 보은 현감으로 있을 때 선대곡과 조남명과 서화담과 이토정이 함께 모여 여러 날 밤을 계속해서 강논하니 영의정 이준경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德星(덕성)이 감응하여 이곳에 모였다고 하였다.

중봉선생 역시 일찍이 보은 현감을 지냈으며 백성을 편안히 다스리는 것을 제일로 삼아서 선조대오앙의 포장을 받은 바 있다.

우암 선생은 병자호란 후에 또한 보은에 그 유적이 있으므로 네 분 선생을 차례로 배양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 숙종 무진년에 우암 선생께서 나 金양行(김양행)의 증조부 문충공에게 글을 보내어 비문을 짓게 하였으나 글이 다 되기 전에 기사 환국이 일어나 선생과 문충공이 화를 입고 賜사(사사)되었다.

그후 90년이 지나서 정유년에 선생의 종증손 되는 宋洙源(송수원)이 또다시 문충공의 손자 되는 나양行(양행)에게 그 일을 기록해 줄 것을 청하므로 외람이 붓을 들어 비문을 짓게 되니 스스로 고루함이 부끄럽고 다섯 선생님의 큰 덕을 형용해서 표현할 수 없어 대략 선인들의 정론을 취하여 삼가 이 글을 짓는다. 후학 통정대부 예조참의 金양行(김양행)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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