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곡리 문화유적
상태바
종곡리 문화유적
  • 보은신문
  • 승인 2005.09.15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선비의 숨결, 보은읍 종곡마을을 찾아서....
1. 백호 임제가 추앙한 스승,대곡 성운선생

나는 누구인가?
누가 이렇게 묻는다면 쉬 대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하나이면서도 여럿이다. 나란 내가 보는 나가 있고, 타인들의 눈에 비친 무수한 나가 있을 것이며, 모든 '판단중지'된 그대로의 나, 나도 모르는 나가 있는 것이다. '판단중지된 나'란 절대자가 보는 나일 수밖에 없기에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내가 보는 나 또한 완전한 나가 아니며, 남이 보는 나라고 하는 것도 극히 부분적일 수밖에 없으니 우리가 어떤 인물을 논한다고 할 때 그것은 아무래도 불완전하고 단편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나 그가 역사적인 인물일 경우는 인물을 만나거나 대화를 해보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오로지 단편적인 자료에 의존해야만 하니 더욱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행이 그와 동시대인이 기록한 행장록이나 편지글,제문 등이 남아 있다면 과문한 후세인인 필자와 같은 사람도 글을 통하여 그 인물을 유추하거나 상상할 수는 있지 않을 것인가.

가을의 초 입이다. 하늘은 더 없이 맑고 깨끗하다. '보은신문 문화기행'에 참가한 우리 일행이 종곡리에 들어선 것은 오전 10시를 조금 넘어서였다. 보은읍 종곡리는 조광조와 더불어 개혁정치를 펼치려다 뜻을 꺽어야 했던 충암 김정 선생의 고향이며, 그보다 10여세 아래인 대곡 성운 선생께서 당대의 뛰어난 유학자들과 교유하던 유서 깊은 마을이다.

지금 우리가 걸고있는 이 마을의 길들은 그 옛날 화담 서경덕이 걸었던 길이며, 남명 조식이나 '토정비결'을 지은 유명한 저 이지함이 다녔던 그길이다. 변치않는 산하, 움직이는듯 보이지만 움직이지 않는 시간...다만, 사람이 바뀌고 나무와 꽃이 바뀌었을 뿐이다.

이 마을에는 충신,효자,효부가 많은 곳이다. 고령신씨 의열비를 비롯해서 의령남씨효부문 등 곳곳에 비각이 널려 있다. 원래 종곡(鐘谷)이란 지명은 북처럼 생긴 종산(鍾山)이 마을 뒤에 있어서 북실이라 되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몇 마을이 합쳐져 지금의 종곡리가 되었다.

지명과 관계되어 내려오는 재미있는 전설 하나가 있다. 이 마을의 뒤에 종산(鍾山)에서 은은하게 종소리가 울리면 마을에 세거하고 있는 경주김씨 문중에서 과거에 합격하는 사람이 나오곤 했다는 것이다. 종소리가 울리는 산을 북산이라 하였고, 마을 이름은 북실이라 하였다.

그런데 그 어느 때 이 마을에 시주하러 왔던 젊은 중 하나가 마을에서 쫓겨나게 되자 앙심을 품고 종산에 올라가 마을의 지혈을 끊으려고 산봉우리를 파헤치니 학(鶴) 한 마리가 하늘로 올라갔는데 그 뒤부터는 북소리가 나지 않게 되었다고 전해온다. 그 종소리를 들은 사람도, 날아간 학을 본 사람도 없지만 말이다.

한눈에 보아도 아늑한 어머니의 품처럼 들어앉은 북실 동네의 들판에는 아직 덜 여문 벼이삭이 누런듯 푸른빛을 띠고 맑고 푸른 하늘과 어울려 우릴 반기는 듯 하였다. 충암 김정 선생은 보은신문 지면을 통하여 이미 여러 차례 다루어졌으므로 우리는 대곡 성운 선생이 강학을 하던 "모현암(慕賢菴)"을 둘러보기로했다.

모현암은 애당초에 사암(斯菴)이라고 했다가 후학들이 대곡재(大谷齋)라 칭하였고, 그 후 1887년 고종 때 모현암으로 개축하였다. 현판은 조선조 말 헌종 때 좌의정을 지낸 입재 송근수의 글씨다.

지금의 건물은 그 뼈대는 옛 그대로였지만 오랫동안 손을 보지 않은 듯 많이 쇠락하고 지친 모습이었다. 15,6년 전 어떤 스님 한 분이 들어와 공부를 하였다 하는데, 현재도 다른 스님 한 분이 모현암을 지키고 있었다.

스님 말로는 이 암자가 참으로 명당이라 했다. 많은 암자를 찾아다니며 공부했지만 이 암자는 왠지 포근하여 헛생각이 들지 않고 공부하기 좋다는 걸 금새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스님은 이곳이 그렇게 고명한 학자가 계시던 곳이냐며 문화재로 지정되어 본래의 모습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대곡선생의 묘와 묘갈은 모현암을 내려와 종곡에서 강신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한참 오르면 길가에 있다. 길에는 잡풀이 무성하였지만 추석을 맞아 금초를 하였는지 손이 없는 선생의 묘지만 그리 쓸쓸해 보이지는 않았다. 일행은 경건한 마음으로 절을 올렸다. 그의 묘갈은 묘소에서 20여미터 아래에 있다.

선생의 사후 50여년이 흐른 현종 때(1633년)에 조성된 것으로 우암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비석에 비해 전각이 너무 작아 비석의 내용을 제대로 살필 수도 없었을 뿐아니라 어른이 아이의 옷을 입은 것처럼 답답하게 느껴졌다.

선생의 묘갈에 씌어진 우암 송시열선생의 찬은 다음으로 미루고 대곡선생의 제자이며 뛰어남 문장가인 백호 임제의 "祭大谷先生文"은 우리에게 선생의 풍모를 좀 더 가깝게 느껴지도록 한다.

조선조 최고의 풍운아로 일컬어지는 백호 임제, 대곡선생만을 유일한 스승으로 삼았던 기개 있는 선비의 문장을 통해서 우리고장 속리산 자락 종곡에서 평생을 기거하며 학문을 했던 대곡 선생을 되새겨 보고자 한다. 그럼 백호 임제는 누구인가?

2. 대곡선생의 제자 임제(林悌)에 대하여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 잡아 권할이 없으니 그를 설워하노라

학창시절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이 유명한 시를 남긴 이가 백호(白湖)임제(林悌,1546-1587)다. 이 시는 임제가 평안부사로 부임해 갈 때 개성에 있는 황진이 무덤에 들려 잔을 붓고 읊은 시다.

사대부가 일개 기생의 묘를 참배하고 시까지 지었다하여 평안부사 부임도 하기 전에 파직 당한 것으로 알려진 선생은 조선조의 낡은 인습과 도덕률에 얽매인 양반들의 의식구조를 풀어 헤친 문명(文名) 높은 대시인이었다. 가식과 위선에서 벗어나 마음껏 사상의 자유로움을 펼친 호방한 그는 평양 기생 일지매와 사랑에 빠진 일화로도 유명하다.

당시 지체 높은 사대부가 기생의 무덤에 시를 바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그러한 멋스러움은 임제가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흉내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본관이 나주인 임제는 1576년(선조 9) 생원시(生員試)·진사시(進士試)에 급제, 1577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했다. 예조정랑(禮曹正郞)과 지제교(知製敎)를 지내다가 선비들이 동서로 나뉘어 다투는 것을 개탄하였다. 벼슬을 그만둔 그는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자연을 즐기고 당대 명문장가로 명성을 떨쳤으니 시풍(詩風)이 호방하고 명쾌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자유분방한 성품이었으나 대곡선생께 사사한 이후 학문에만 정진하여 속리산에서 "중용(中庸)"을 800번 읽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당대의 명문장가로 매일 1000개의 어휘를 암송했다 한다.

그의 눈에 비친 조정은 앞서 말한 대로 동서 당파싸움으로 서로 헐뜯고 비방하고 질시하면서 편당을 갈라 공명을 탈취하려는 속물들이었으며, 그의 눈에는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벼슬에 대한 흥미를 잃은 그는 울분과 실의에 가득 찼다. 10년간의 벼슬을 버리고 유람을 시작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많은 일화를 남겼다.

기인, 또는 법도에 어긋난 사람이라 하여 사람들은 그의 글은 취하되 사람은 사귀길 꺼려했다. 워낙 시재가 뛰어났던 그의 호방하고 쾌활한 시풍은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일컬어져 많은 사람들이 애송하였다. 율곡 이이도 그를 기남아(奇男兒)라고 하였다 전한다. 그의 시 한편을 읽어보자.

세상에 태어나서 만주 땅을 못 삼켰으니
그 어느 날에나 서울 땅을 다시 밟을 것이냐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말을 재촉해 돌아가는데
눈이 시린 저 먼 하늘
짙은 안개가 걷히는구나

그의 사상은 호방하면서도 명쾌하고 드높은 기상을 지녔다. 나라의 자주성회복과 강대한 고구려의 옛 땅 만주를 되찾고 세계를 호령하고 싶은 심정이 절절히 표현된 이 시는 전라남도 나주에 있는 그의 묘 앞의 시비(詩碑)에 적혀있다.

임진왜란 발발 17년 전인 25세 때인 1575년 경에 호남에 왜구가 침입하자 백의종군하여 공을 세우기도 했던 그는 30세가 넘어선 영남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시를 남겼고, 전국 각처를 돌아다니면서 민중 속에 뿌리 깊은 서민의식을 시로 표출했다. 39세를 일기로 요절할 때까지 생전에 그가 지은 시는 1000수가 넘는다고 한다.

호탕하고 기발한 그의 시는 항시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당시의 대문호 신흠은「백호문집」서문에서 "내가 백사 이항복과 만나 임 백호를 논하기를 여러 번인데 매양 기남아로 일컫었고, 또 시에 있어서는 그에게 90리나 훨씬 뒤떨어져 그에게 양보할 수 밖에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대곡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그 슬픔으로 의욕을 상실한 그에게 어느새 知己가 끊어지고 방황하다가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문집인 백호집(白湖集)에는 700여 수의 주옥같은 한시가 전한다.

道不遠人人遠道 (도는 사람을 멀리 않으나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
山非俗離俗離山 (산은 세속을 떠나지 않는데 세속이 산을 떠나네)

속리산을 노래한 이 시는 임제가 스승이 사는 속리산 자락에서 중용을 800번 읽고 얻은 것으로 전해지는데 분명치는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조선조 최고의 풍운아로 일컬어지는 백호 임제가 평생의 스승으로 존경하여 모신 대곡 성운선생은 과연 누구인가?
(다음호에 계속)
/남광우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우리고장 문화기행>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