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장환 문학제 추진위원장 도종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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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장환 문학제 추진위원장 도종환 시인
  • 송진선
  • 승인 2005.05.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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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없이 우리에게 다가와 문향 솔솔 피워
국민들이 좋아하는 시인 중의 한 명인 도종환 시인을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경우가 문학인 아닌 경우에야 얼마나 될까.
책으로 만나는 것만도 다행스럽다고 생각했을 때 그가 친숙하게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것도 우리지역 주민이 돼서 말이다. 그가 우리와 같은 주소를 쓰고 있는 것이다.

오장환문학제 추진위원장
일체의 외부활동을 끊었다고 했다. 신문도, 텔레비전도, 라디오 등의 통신 매체도 없다. 어느 날은 하루 종일 말 한마디도 하지 않을 때도 있다.
물론 사람 만나는 일은 더 더욱 어렵다. 가끔 우편물을 전해주는 우체부 아저씨와의 만남만이 유일하게 사람을 보는 날일 때도 있다. 몇 년을 이렇게 지내는 일이 일상화 됐다.

그런 그가 오장환문학제 추진위원장을 맡았다. 모든 직책을 정리하고 자신을 추스리는 일에 더 열중했던 그에게 오장환 문학제추진위원장은 또 하나의 짐을 지는 일이었다.

그러나 문학제의 10주년을 기점으로 시성이라고 일컫고 있는 오장환의 이름에 걸맞게 문학제의 수준을 끌어올리려는 박재완 보은 문화원장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5월21일 문학제가 열리는데 그가 추진위원장을 수락한 것은 3월. 불과 두 달 남짓 남은 시간.
일부 기획부분만 조금 잡아보자는 생각이었지만 일복은 이번에도 그를 편하게 두지 않고 처음부터 모든 것을 그가 직접 나서야 했다.

오장환을 기록하며
그가 추진위원장이 되면서 시작한 일이 오장환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그가 태어난 회인지역을 다니며 노인들로부터 오장환에 대한 증언을 담고 회인초등학교에서 그의 학적부를 담았고 회인초등학교 5학년때 이사를 갔던 안성지역의 그가 졸합한 학교에서 오장환을 담았다.

그리고 휘문고등학교를 찾았고 재종손을 만나 그가 기억하는 오장환도 수록했으며 오장환을 연구한 교수도 만났다.

오장환을 연구해서 따낸 박사논문 14점과 석사학위 논문 41점도 찾아내 모두 영인본으로 만들었다.

그러면서 오장환의 미발표 시도 찾아냈고 이중섭 화가가 죽은 그를 추억하며 그린 그림도 확보했다.

특히 20대 후반 밖에 안된 그의 작품 ‘석탑’이 미군정시절 중학교 5, 6학년 교과서에 수록되었고 지금 청주에 있는 서원대학교 도서관에 당시의 교과서가 보관되어 있다는 것도 밝혀냈고 그 작품도 담았다. 발품을 팔아 전국을 찾아다니며 얻은 성과물이기도 하다.

돈이 되는 일도 아니고 그에게 시간이 많아서도 아니며 몸을 추스리도록 처방했던 의사가 이젠 완쾌됐다는 진단을 내린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이일을 하면서 오장환에 대한 문학사업을 지금부터라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오장환 기념사업을 보며
현재 보은군에서 추진하고 있는 회북면 중앙리 생가 복원과 문학관 건립 사업을 보며 앞뒤가 바뀌었다는 지적을 했다.

생가의 경우 원형이 그런대로 잘 보존되었기 때문에 이를 살리면 되지만 문학관의 경우 그 안에 전시할 자료 등을 우선 수집한 다음에 건물의 모양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정해야 한다는 것.

그러나 지금은 자료 수집도 제대로 하지 않은 상태에서 문학관 집의 모양이 나왔는데 우선 집부터 지어놓고 자료는 수집되는 대로 전시하면 된다는 식이라고 지적했다.

전문가, 문인, 학자 등의 자문을 구하고 의견을 충분히 들은 후 문학관의 규모와 모양, 이미지 등을 잘 맞춰서 문학관을 지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시인 도종환
기자에게 다가온 그의 첫인상은 나이보다 훨씬 어려보였고 생각보다 몸이 슬림하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이가 다 드러날 정도로 환하게 웃는 웃음이 청아하다는 느낌을 줬다. 그리고 영혼이 맑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그에게서 나오는 시어들이기에 감동을 주고 눈물짓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부드러우면서도 곧은 시인, 앞에는 아름다운 서정을 두고 뒤에는 굽힐 줄 모르는 의지를 두고 끝내 그것을 일치시키는 시인’이라는 시인 도종환을 단정하는 이 말에 정말 고개를 끄덕였다.

충북 청주에서 태어난 도종환 시인은 충북대 사범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충남대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였으며, 주성대학 문예창작과 겸임교수를 역임하였다.

1977년 청산고등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교사의 길과 시인의 길을 함께 걸어오던 도종환 시인은 1989년 전교조 활동으로 인해 해직되고 투옥되었으며, 1998년 해직 십 년 만에 덕산중학교로 복직하여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학교를 그만 두고 내북면 법주리에서 잠시 쉬고 있다.

이른바 동인지 문단시대로 불리던 1980년대 초 동인지 ‘분단시대’에 ‘고두미마을에서’ 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시 ‘어떤 마을’이, 고등학교 문학·국어교과서에 ‘흔들리며 피는 꽃’ 등 여러 편의 시와 산문이 실려 있으며, EBS TV ‘도종환의 책과 함께 하는 세상’ 의 진행을 맡기도 하였다.

시노래 모임인 ‘나팔꽃’의 동인으로 시를 노래로 만들어 부르는 일에 참여하고 있고 제 8회 신동엽 창작기금, 제 7회 민족예술상, 제 2회 KBS 바른 언어상 등을 수상했다.
 ‘고두미마을에서’, ‘접시꽃 당신’,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 ‘부드러운 직선’, ‘슬픔의 뿌리’, 등의 시집이 있다.

산문집으로는 ‘지금은 묻어둔 그리움’, ‘그대 가슴에 뜨는 나뭇잎배’, ‘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 ‘모과’,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가 있으며, 교육에세이 ‘마지막 한 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이 있고, 어른을 위한 동화 ‘바다유리’가 있다.

보은군민인 도종환
내북면 법주리에 살고 있는 도종환 시인이 보은군민이 된 것은 지난 2003년이다. 건강악화로 2003년 3월, 28년간의 교사생활을 접고 법주리로 들어왔다.
하늘만 보일 정도로 산속에 있는 구구산방(龜龜山房)이라 이름붙여진 황토집은 절친한 친구이며 전교조 활동을 같이해 온 사람이 ‘오래 오래 살라’는 뜻으로 명명하고 직접 지었다고 한다.

일체의 사회와의 인연을 끊고 집 주변에 있는 채마밭에 상추, 호박, 도라지 등을 가꾸고 닭도 키우고 난방을 위해 장작도 패는 아직은 어줍은 시골 농사꾼으로 지냈다.

그런 와중에도 그 손에서는 책이 떠나지 않았고 창작활동을 접지 않았다.
그가 보은으로 들어온 후 발표한 산문집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는 그가 이곳에 머물며 깊은 사색으로 빚어낸 담백한 글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살아있는 자연과 함께 호흡하면서 그의 몸에 기운이 충천해지고 그가 쏟아내는 단아한 시어들이 독자들에게 호평을 받는 것도 어쩌면 다른 곳이 아닌 바로 보은에서 살면서 받은 축복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탓일까. 그는 지금 보은에 아예 거주할 생각을 하고 있다.
문단에서 차지하는 위치, 아니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이름 석자만으로도 그의 유명세를 치를 정도인 큰 인물 ‘시인 도종환’.
보은으로서는 얼마나 큰 축복인가. 10주년 오장환 문학제 추진위원장이 그를 완전한 보은인으로 만든 것 같다.
또 하나의 오장환 시인의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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