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의 어제와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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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의 어제와 오늘
  • 보은신문
  • 승인 1990.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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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때부터 ‘報恩’으로 불려
보은에 삶의 뿌리를 둔 주민들에게 새로운 인식을 불러일으키고 우리 고장에서 태어나 외지에 살면서 피부적으로 접하지 못한 분들게 보은의 개괄적인 면을 알려주고자 하는 바램과 자라나는 후대들에게 자기가 태어난 고장의 뿌리를 구체적으로 밝혀 줌으로써 고장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더욱 크리라고 보아 보은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본다.

보은은 내륙 산간지역에 위치하여 예로부터 충절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고 명승고적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마다 주민이 힘을 합쳐 외세에 대항했고, 우직한 절개와 기강을 과시했던 우리 고장은 산수가 화려하고 물 맑은 곳에 위치하여 속리산 법주사 외에도 많은 고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우리 고장의 꽃으로는 개나리가, 나무로는 보은의 명물 대추나무가 선정되어 있고, 예부터 군민에게 희망과 희소식을 전해주는 새로 길조라 하여 군민 모두가 사랑하며 군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까치가 군을 상징하는 새이다.

보은의 유래
은혜를 갚는다는 아름다운 명칭을 가진 보은군은 오랜 옛날 삼국시대에는 삼년산군(三年山郡) 또년 삼년군(三年郡)이라 칭하였다. 서기 470년 신라 제20대 자비왕 13년 보은읍 동쪽 4㎞ 지점에 백제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산성을 쌓고 삼년산성(三年山城)이라 이름하였는데 전설에 의하면 성을 쌓는데 사면이 걸렸다고 하여 삼년산성으로 칭하고 있으며 삼년산군으로 불리워진 것도 역사에는 삼년산성이 쌓아진 자비왕 13년 (서기 470년)부터로 기록되어 있다.

그 후 고려 왕건 태조 10년(서기 928년)에 보령(保齡)으로 고쳐 부르다가 조선국 제3대 태종 6년(서기 1406년)에 보은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는데 이는 태종이 등극한지 3년 되던 해 시자를 시켜 신라때부터 명찰로 이름 난 속리산 법주사에서 억울하게 살해된 두 왕자 동생들의 원혼을 달래는 천도불사를 크게 벌여 위로 하였다고 한다.

그후 향상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던 죄의식과 두려움이 말끔히 가시게 되자 크게 감탄하며 기이하게 생각하고 있던 태종은 즉위한지 6년째 되던 병술(丙戌)년 (서기 1406년)에 지방 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조정하던 기회에 충청도에 보령이라는 지명이 둘이 있어 중복된다고 개명할 것을 지적하면서 갚은 보(報)자, 은혜 은(恩)자를 넣어 보은이라 칭하도록 하명 하였다는 것이다.

연혁
현행 대한민국 헌법의 권능이 미치는 국토의 영역으로 보아 가장 중심지에 위치한 보은지역의 역사적 기록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하였던 보은지역이 삼국시대로 넘어오면서 신라와 백제의 국경에 위치하여 신라의 국세가 성할 때엔 신라로, 백제의 국력이 강할 때는 백제의 영토가 되는 분쟁지역이 되었다. 그러나 신라 20대 자비왕 13년(서기 470년)에 삼년산성이 축성되면서 신라의 북방 요새지로서 국토 확장의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 지증왕 3년(서기 502년)에는 삼년산군에 속하였으나 경덕왕 원년(서기 741년)에 삼년군으로 바뀌었고, 고려 현종 9년(서기 1018년)엔 상주군에, 조선 태종 6년(서기 1406년)엔 보은현에 귀속되었다. 그후 고종 32년(서기 1895년)에 이르러 칙령 제98호에 이거하여 보은군이라 칭하였고 1914년 3월1일부로 회인군이 편입되었다. 1947년 1월31일부터 속리면이 내속리면과 외속리면으로 분리되어 11면이 되었다가 1973년에 보은면이 보은읍으로 승격도이어 현재까지 1읍 10면을 유지하고 있다. 1983년 2월 15일 에 대통령령에 의해 회북면 세촌리가 내북면으로 조정되었고, 내북면에 속해있던 중초리,산성리,노티리,용암리,봉평리,장속리가1987년1월1일부터 보은읍에 속해졌다.

이와 함께 회남면 노성리가 수한면으로 편입되었고,보은읍 누저리가 누청리로,내속리면 묘막리가 만수리로 명칭이 변이라고 전해오는데 적암리 시루봉,세중리 증산촌에 수한면 장선리 내북면 백운동 등이 각각동,남,서,북증이다.또 멍에목,갈목,새목,불목 등 팔목이 특징으로 이루어진 고장이며 속리산과 법주사등 명산 대찰이 있어 예부터 국왕을 비롯한 명사들의 나들이가 잦았던 고장이었다. 특히 속리산은 한국 팔경의 하나로 보은군은 십승지지(十勝之地)로 명성이 높았던 고장이다. 하늘이 내려 준 아름다운 경관을 간직하고 있는 속리산은 기이한 아홉 개의 봉우리가 있어 구봉산(九峰山)으로, 또는 작은 금강산(小金剛)으로도 불리두고 있는데 속리산에 자생하는 희귀한식물과 함께 일초일목(一草一木)에 이르기까지 역사와 설화가 깃들어 있는 유서깊은 명산이기도 하다.

그러나 보은의 역사와 전설,설화는 삼년산성을 축조하면서 본격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동으로 경북상주군과 접경을 이루고 있는 마로면 임곡리는 작은 개울을 경계로 한 부락을 이루고 있으면서도 사용하는 언어가 판이하게 달라 경상도와의 경계를 실감나게 한다. 남으로는 옥천군, 서북으로는 청원군과 괴산군을 경계로 하고있어 보은군민의 언어는 표준어에 가까운 충청도의 언어로 부드럽고 친근감이 있다.


주민생활과 풍속
△ 행정구역
행정구역은 1읍10면으로 법정리·동 1백74개리, 행정 리·동244개리로 되어 있으며 460개의 자연마을과905개의 반을 관할하고 있다. 면적은 총 599.62㎢으로서 이중 임야가 419.43㎢로 70%를 차지하고, 논이 63.26㎡로 11%, 밭이 59.02㎢로 10%, 기타 57.91㎢로 9%로 차지하고 있다. 각 읍·면별 면적을 살펴보면 보은 62.25㎢, 내속 92.13㎢, 외속 29.85㎢, 마로 68.47㎢, 탄부 31.56㎢, 삼승 28.14㎢, 수한 48.76㎢, 회남 49.50㎢, 회북 67.25㎢, 내북63.07㎢, 산외 58.64㎢로 임야로 많이 보유하고 있는 내속이 제일 많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인구 및 가구
군내 인구현황을 살펴보면 80년도 8만 5천 1백 71명에서 88년도(12월 31일 현재)에는 6만 31명으로 해마다 3천여명 꼴로 줄어들었다. 총 인구6만 31명 가운데 남자가 3만 3백 8명이고 여자가 2만 9천 6백 73명으로 남자가 6백73 명 더 많은 추세를 보이고 있다. 군내 연간 출생률은 9백61명으로 1일2.6명 꼴로 태어나고 사망은 2.2명으로 나타나고 있으면 전입이 1일14.3명인데 반해 전출은 1일 25.14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 혼인은 1천 3백 8명으로 하루에 3.6명이 결혼한 셈이며 이혼율은 107명으로 1일 0.3명 꼴로 갈라선 셈이다. 가구수는 1만 5천3백97가구로 이중 농가는 67%인 1만 3백62가구이고, 비농가는 5천35가구의 분포를 보이고 있으면 한 가구는 인원은 3.9명으로 나타났다.

△재정과 세무
보은군 89년도 재정규모는 총 177억5천1백만원으로 이중 일반 회계는 165억2천3백만원, 특별회계는 12억2천8백만원의 규모였다. 일반 회계는 주로 인건비,지역개발비,산업경제비,사회복지사업비등이고 특별회계는 주택건설, 상수도건설, 의료보호, 영세민 안정분야에 쓰인다. 지방세 수입은 26억5천4백4십8만4천원으로 1인당 4만 4천2백18원을 납세하는 셈이다.

△금융
보은군의 금융현황을 보면 충북은행 지점과 농협 보은군 지부, 단위농업협동조합 10개, 축협조합 및 신용협동조합 5개소, 새마을 금고 6개소가 있다. 군내 10개 단위농협 중 가장 자산이 많은 보은 단위조합의 경우 총 자산이 156억 32백만원이며 89년 예금현황은 78억 7천만원 이었다.

△주택
군내 총 주택수는 1만 5천 83동인데 이는 총 1만 5천 3백 97가구의 97.9%에 해당된다. 도평균 주택보급율 82.2%보다 15.7%가 높다. 또한 아담하고 편리한 소형주택 보급을 위해 지난 82년부터 86년까지 12동의 아파트와 연립주택 건립에 11억 2천 1백만원을 융자 지원하여 2백 59세대가 입주했다.

△공업과 농업
산간지방인 보은군은 공장입지 조건에서 외면당해 왔지만 청주 주물공장, 성지산업, 화신직물, 동광산업, 학산실업, 성하상사, 대성산업 등 소규모 공장에서 1천여명의 종업원이 연간 4백 6만 4천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리고 있다. 또 89년도 창업한 업체로는 고미산업, 일곡의료, 대진물산, 일원식품, 진미식품, 신화상사 등이고 앞으로 금굴리 농공단지와 한국화약(착공 89. 3. 16)이 준공되면 보은의 공업은 매우 큰 발전을 가져 올 수 있고 소규모 업체들도 더 늘어날 전망이다.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총 1만 2백 41가구 4만여명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농경지는 122.29㎢로 호당 경지면적은 1.20㏊이다. 군내에서 기르는 한우는 1만 9백지두이며 농가 1호당 1.04두이다. 동력경운기는 4천 3백 12대로 농가 1호당 0.41대를 소유하고 있다.

△문화생활
군내에 자동차 소유대수는 1천 3백 39대(관용58, 자가 1057, 영업 224)로 11가구당 1대꼴이며 교통사고 비율은 연내 127건으로 1일 0.3거이 발생했다. 또 급수량은 2931M/T로 일인당 하루 217ℓ를 사용하는 셈이며 전화는 1만 1천 9백 93대로 1.6가구당 1대가 설치된 셈이다. 또한 이·미용사는 84명으로 1인당 7백 14명을 상대하고 있으며 의사는 52명으로 1인당 1천 1백 54명을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

△관광과 문화창달
국립공원 속리산(국립공원 제 28호, 1백5㎢) 천왕봉 등산로(괴암기봉), 삼가저수지와 서원계곡(외속리면 서원리 옥수절경), 대청댐(회남면 거교리 낚시터), 구병산, 삼년산성, 상궁저수지(내북 상궁리 낚시터), 위성통신 제4지구국(마로면 적암리 관광명소), 보청저수지(수한 병원리 낚시터) 등이 있으며 연중 관광인파는 백만명을 상회하고 있다. 또한 문화유산의 보존관리와 전통문화의 계승 발전을 위해 삼년산성 성곽보수, 선병국 가옥보수, 법주사 청동미륵불상 건립비를 세우고 연례적인 문화행사인 속리축전은 대추아가씨 선발과 병행실시하여 더욱 다채롭고 알찬 문화행사가 펼쳐진다. 속리축전은 1977년 10월 본 지역 출신 육인수 국회의원께서 국립공원 속리산을 주축으로 한 문화행사를 제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속리축전의 행사로는 탑돌이, 씨름, 그네, 가면탈춤, 농악놀이, 민속가장행열 등 다채로운 행사로 꾸며져 보은군민의 문화행사로 정착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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