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을 사수한 민간유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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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을 사수한 민간유격대
  • 보은신문
  • 승인 1993.06.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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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지역을 지키기 위해 일어선 속리산 유격대
전쟁세대는 물론 전후세대까지도 한민족이라면 누구 나가 6·25사변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중 법주사와 속리산을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서 목숨을 걸었던 속리산 유격대원들은 해마다 6월이 오면 당시 숨막혔던 공비소탕 작전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지금도 누더기 옷을 입고 공비소탕을 하던 꿈까지 꾸기도 하고 저 세상 사람이 된 동료대원들이 더욱 생각난다는 속리산유격대원들. 당시의 유격대원들 대부분이 세상을 뜨거나 도시로 떠나가도 아직도 지역의 파수꾼으로 남아 노익장을 과시하며 속리산에 거주하고 있는 여섯 대원들은 피를 나눈 형제보다도 더 가깝게 노후를 다독거리며 살아가고 있다.

김종섭(77. 유격대장) 박뇨식(72. 사내5) 정인성(71.사내1) 조승일(69. 사내1일) 강창옥(68. 사내5) 박용주(68. 사내4)씨가 그 주인공들이다. 6·25사변이 끝난 후 본대에 합류해 후퇴하지 못하고 산 속으로 들어간 인민군들이 먹을 것과 생필품을 구하려고 마을로 내려와 무자비한 폭행과 인명사상을 서슴지 않고 민가를 습격하거나 관공서를 공격해, 험준한 산악을 끼고 있는 속리산 주변 마을 주민들은 공비로부터의 위협 속에 불안에 떨며 살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사변 중에는 대한청년단 훈련부원으로서 내속지서의 보초를 섰던 청년들이 가족과 지역을 지키자는 뜻을 모아 유격대를 조직, 합동작전이나 개별작전을 펴고 또는 군부대에게 길을 안내하기에 이른 것.

이들 유격대원들은 전투경험도 없었고, 인민군들이 후퇴하며 버리고 간 총을 주워 무장한 채 지역의 파수꾼으로서 앞장서는데 불과했지만, 속리산에서 태어나 자란데다 산돼지 사냥, 버섯 채취, 나물케는 사람 등 산의 지리에 밝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공비토벌에는 제격인데다, 지역을 지키겠다는 의지 또한 하늘을 찌를 듯이 충천해 있었다. 하지만 화랑부대의 동가출이 작전에 처음 참가한 유격대원들은 민간인들과 함께 한겨울 눈덮힌 산길에서 짐을 지고 길잡이를 하다 눈에 파묻혀 얼어죽거나 부상을 입는 등 첫출전부터 사기가 저하되는 어려움도 있었다.

그리고 경찰이나 부대의 지원 없이 단독으로 출전한 문바우작전에서는 무기, 식량 등을 상당량 빼앗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고, 또한 청주도청을 습격하고 속리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가던 2백70명의 인민군 부대가 새텃말(사내리)동네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곡식을 털어 가던 것을 역부족으로 지켜보기만 해야했던 쓰라림도 있었다. 또한 법주사에 공비가 출몰한다는 연락을 접한 속리산유격대는 당시 대원이 몇 명밖에 없었지만 2교대로 밤새 잠복하고 있다가 탐색하러 온 척후병을 사살하고 다음날 경찰의 지원 속에 법주사와 문화재를 방화하러온 이들을 상대로 방어, 귀중한 문화유산을 지키는데 큰 몫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후 대모골은 물론 상주군의용화 등지까지 원병으로 출동해 수 없이 공비를 토벌, 3년여동안 활동하다 해체되었다. 당시 이들 유격대원들의 나이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전반으로 모두들 결혼해 가정을 꾸미고 있었지만 가족과 지역을 지켜야한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목숨을 건 공비소탕 작전에 앞장선 것. 법주사와 문화재를 사수한 공로를 인정한 법주사(주지 고정일)에서는 6·25를 맞아 올해 처음 김종섭 유격대장에게 공로패를 전달, 유격대원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들의 바램은 없다.

오직 내가 살고 있는 고장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유격대에 지원했으리만큼 그들은 지금도 "정부가 당시 민간인 차원에서 지역사수 활동을 했다는 것을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라며 "보은군지 등에라도 기록으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한다. 지역의 사수 민간노병인 이들 유격대원들은 오늘도 지역발전과 맞물린 작은 일 하나라도 소중히 생각하며 젊은이들을 북돋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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