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로면 소여리 김주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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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면 소여리 김주기씨
  • 보은신문
  • 승인 1993.06.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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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군인의 꿋꿋한 삶, 오른팔 불구극복… 적극적인 지역활동 전개
삼천리 강산에 포연이 자욱했던 1950년 6월, 피비린내 나는 능선에서 전우의 한맺힌 눈을 감겨주면 돌아서서 또다시 산야를 누벼야 했던 병사들 당시 25세이던 김주기씨(69.마로 소여)가 마을천년들과 함께 대한청년단 소속 방위대로 지원한 것은 임민군이 수원근처까지 내려온 7월7일이었다. 3일간의 훈련을 받고 경북 경산으로 내려가 2일간 추간훈련을 받은 것은 군입대와 훈련의 모두였다. 화기의 이름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채 생사의 갈림길로 뛰어든 것이다. 김주기씨가 소속된 부대는 1사단 3대대 10중대로 전세가 밀리면서 경북 해평, 칠곡을 거쳐 팔공산 근처의 무악산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끼니를 거르고 무더운 날씨에 물도 마시지 못해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으나 정상탈환을 위해 무악산 기슭을 오르내리길 10여일, 총화력을 동원해 정상을 탈환, 여세를 몰아 팔동산 마저 점령하고 방어기반을 튼튼히 다졌다. 전열을 가다듬고 호를 구축하던 중 김주기씨는 갑자기 무언가 등을 세차게 때리는 느낌을 받았다. 인민군이 쏜 총알에 오른팔이 맞아 부러지면서 등으로 젖혀졌던 것이다. 7월15일 전투에 참가해 9월7일 부상을 입고 후송될 때까지 김주기씨가 겪은 6·25였다. 상이군인으로 제대한 뒤, 오른팔이 구부러지지 않아 왼손 하나로 세수도 하고 머리도 빗는다는 김주기씨는 40여년 전전을 회고하며 회한에 잠긴다.

전쟁중에 제대해 고향에 돌아온 김주기씨는 전쟁의 고통을 뒤로하고 부모, 형제들과 생활하면서 주민들의 간곡한 부탁으로 이장직을 맡게되었고 이후 8년간을 마을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61년에는 5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마로면사무소에서 7년 8개월간 근무하기도 했으나, 연로한 부모를 모시고 고향땅을 일구며 살겠다고 결심, 공작을 그만두고 농사일에 전념하였으며, 이때 또다시 마을의 새마을지도자를 맡아 마을단위 큰 공사에 적극나서 추진하기도 했다. 김주기씨 가족은 부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해 80세된 노부모가 돌아가시기 3년전부터 모두 중풍으로 쓰러져 대소변은 물론 목욕까지 모두 수발을 들기도.

이렇게 효도하는 모습이 주위에 전해져 '85년 부모님 생존시에 4대가 함께 사는 전통모범가정으로 선정돼 보사부장관상과 3박4일간의 산업시찰, 1백만원의 상금을 받기도 했다. 상이군인 5등급으로서 매월 25만원과 노령수당 3만원, 전상수당 7천원을 받고있는 김주기씨는 "60여명의 상이군경이 군내에서 생활하고 전상자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바램을 말하기도.

젊은시절의 한많은 고통을 평생토록 가슴에 안은채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안타까와 하면서도 싱의에 빠지지 않고 현실을 성실하게 이끄는 김주기씨는 '89년부터 소여1구 고향에서 노인회장을 맡아 마을의 태극기 보급, 게양을 선도하고 마을화합을 위해 날달리 꿋꿋한 의지를 보이며 노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금주에 만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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