깍고 다듬는 이발인생 사십여년, 작은 가위 하나로 여섯동생 뒷바라지
마로면 관기리에 자리하고 있는 대성이발관은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휘황찬란한 네온사인과 짙은 색깔의 유리창 속에 자리잡은 여느 이발관과 달리 페인트칠이 벗겨진 낡은 간판을 달고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야말로 소박하고 작은 이발관이다. 하지만 이곳을 찾아드는 분주한 발길에는 언제나 도타운 정이 감돈다. 머리를 깍으러 오는 이발손님 보다는 주위의 이야기 거리를 늘어놓기 위해 찾아드는 손님이 더 많은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곳 사랑방의 주인이자 이발사인 원용근씨(60. 마로 관기)도 촌로(村老)의 머리를 세심하게 다듬는 손길이 제법 바쁘기도 하지만 모여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더 관심이 있는 듯 하다.
군내에서 가장 오랜 이발사경력을 갖고있는 원용근씨, 18세때 생활형편이 어려워 먹고 살기위한 직업을 찾다가 우연찮게 놀러갔던 이발소에서 어깨너머로 배우기 시작한 것이 평생직업이 되었다.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난 원용근씨는 1·4후퇴때 전가족과 함께 마로면 관기리에 정착하면서 보은과 인연을 맺고 군에서 제대하던 `62년 관기리에 이발소를 차린 지 어언 삼십년……고려대 법대를 졸업시키는 등 여섯이나 되는 동생들의 학업과 결혼을 작은 가위 하나로 뒷받침해온 그는 지난 15일 큰며느리를 맞아들이기도 했다. 자신의 삼남매도 이젠 자리를 잡아 사회에서 제몫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마로면내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손길을 거쳐갈 정도로 많은 세월이 흘렀고, 그 세월동안 평범한 이발사로서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도 많았지요"라며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는 그의 얼굴에 주름이 깊다. 30여년전 맘보머리가 유행하고 `70년대의 장발에서 지금 또다시 장발로 이어지는 유행을 반추하며 원용근시는 "죽을 때까지 다 못배우는 게 이발기술입니다.
사람마다 성격과 머리모양이 다 다르니까 손님비위를 제대로 맞추는 사람이 최고의 이발사로 통하지요. 그렇게보면, 저는 손님비위를 못맞춰서 주위에서 좋은 이발사 소리를 듣지 못했을 겁니다"라며 큰소리로 웃는다.
"돈도 좋지만 세상일이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순리적으로 되는 것인 만큼 일확천금을 위해 퇴폐이용업을 하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밝은 세상을 만드는데 적게나마 보탬이 되려면 퇴폐이용업은 근절되어야 합니다"라며 세인의 지탄을 받고있는 퇴폐이용업소에 대해 일침을 가하기도. "힘닿는 한 이발업을 계속 하겠다"는 원용근씨의 다짐과, 명예도 돈도 뒤따르지 않고 누가 알아주는 직업은 아니지만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그의 진솔한 모습이 지켜보는 이를 숙연케 한다.
예전에는 마을마다 있었던 이발소가 하나둘 문을 닫거나 전업을 하고, 농촌인구 감소로 찾는 손님도 별반 없지만, 굳이 원용근씨가 이 가위질을 놓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필요 없이 긴 머리카락을 가위질로 잘라내 버리듯이 모든 더럽고 추악한 것들을 자라내는 듯 느껴지기 때문이 아닐까. 팔순이 넘은 노모를 모시고 부인 이봉선 여사(55)왕의 사이에 2남1녀를 둔 원용근씨는 오늘도 변함 없는 모습으로 반가이 이발 손님을 맞는다.
저작권자 © 보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