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은 태종6년에 縣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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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은 태종6년에 縣이 되었다
  • 보은신문
  • 승인 2003.04.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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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건 식(보은 교사)
퇴직한 이후 금년에 군수 읍면순회업무보고대회에 모처럼 초청을 받고 참석하여 군에서 배부하는 “2003년도 주요업무계획”과 참고할 것이 있어 부탁하여 “통계연보”를 구하여 볼 기회가 있었다.

두 책자에 수록된 보은군 연혁에 보면 보은군이 현으로 승격된 해를 1416년(조선 태종16)으로 기재하고 있다. 종전까지 보은군이 현으로 승격한 해를 1979년 보은군 발간 「군정보고서」에는 “이조 태종6년에 保令이 충청도 保寧과 음이 같다하여 報恩이라 개칭하고 최초로 縣監을 두었다.

태종13년에 경상도로부터 충청도에 복귀되었고 正祖14년에 순조 태실을 속리산에 봉안함으로써 그 봉을 태봉(胎峰)이라 칭하고 縣을 郡으로 승격시켰다”라고 기록하였고 1981년 보은군 간행 「내고장전통가꾸기」에는 “이조에 접어들어 태종6년(1406년)에 報恩이라 고치고 현감을 두었다 동 13년에 경상도 상주목에서 충청도에 편입하기에 이르렀고 순조 때 郡守로 올렸으며 고종32년(서기1895년)에 군으로 고쳤다”라고 기재하였다.

다시 말하면 보은이 현으로 승격한 것을 종전에는 1406년인 태종6년으로 하였는데 비하여 언제부터인지 10년 뒤인 1416년 태종16년으로 변경하여 군에서 발간하는 각종 유인물이 기재하고 있어 혼동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보은이 縣이 된 것은 언제인가? 문헌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조선에 들어와 최초의 지리지인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본조 태종16년 병신에 보령현과 음이 비슷하여 보은현감이라 고쳤다(本朝太宗十六年丙申以與保寧縣音韻相近改爲報恩縣監)”이라고 기록되어 발음이 보령과 같다하여 保令을 報恩이라고 고쳤음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에서 “현감을 두었다(置縣監)”가 아니라 “현감이라하였다(爲報恩縣覽)”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中宗25년)(1530년)에 완성된 「東國輿地勝覽」은 “태종6년 보령현과 음이 같아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예에 따라 현감이라 하였다(太宗六年以與保寧縣音相近改今名例爲縣監)”이라고 기록함으로 10년 차이가 나타나고 있으며 이후 발간된 각종 지리지도 東國輿地勝覽의 건치 연혁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1899년(광무3) 발간 「報恩郡邑誌」에는 “태종6년 보령현과 음이 같아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보은현감이라 하였다 가경15년(1810년) 庚午 순조대왕 태실을 속리산에 봉안한 후 군으로 승격 되었다(太宗六年以與保寧縣音相近改今名爲報恩縣監 嘉慶十五年庚午純祖大王胎室奉安于俗離山後陞郡)”이라고 기록되었으며 일제시대인 소화11년(1936년)에 간행된 「朝鮮環輿勝覽」은 “조선 태종6년 병술 보령과 음이 같아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예에 따라 현감이라 하고 경상도로부터 본도에 예속되었으며 순조태실을 속리산에 봉안하고 군으로 승격 군수를 두었다(朝鮮太宗六年丙戌以與保寧音相近改今名例爲縣監 自慶尙道來隷本道 奉安純祖胎室俗離山陞爲郡置郡守)”라고 기록되어있다.

또한 1970년도 발간 「報恩郡誌」는 “朝鮮太宗六年丙戌에 保令이 忠淸道 保寧과 音相似하므로 報恩이라 改稱하고 例로 縣監을 置하다 朝鮮太宗十三年癸巳에 慶尙道로 부터 忠淸道에 來隷하다 朝鮮正祖十四年 庚戌에 純祖胎室을 俗離山에 奉安하므로 그 峰을 胎峰이라 稱하고 縣을 郡으로 陞格하다”라고 기록하였으며 최근인 1993년도 발간 「報恩郡誌」도 “조선에 들어와서 1406년(태종6)에 이름이 충청도 보령(保寧)과 음이 비슷하다하여 보은(報恩)이라 고쳐 부르고 현감(縣監)을 두었다 이어 1413년(태종13)에 경상도로부터 충청도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1806년(순조6)왕의 태실(胎室)이 속리산에 있으므로 현감을 군수(郡守)로 승격시켰으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종전의 군 연혁에 縣으로 된 것은 태종6년(1406년)이라 계속하여 기록하였던 것을 언제 무슨 근거에 의하여 태종16년(1416년)으로 고쳤는가? 태종실록의 기록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태종 16년 丙申 음8월8일 己巳에 “고을들의 이름을 고쳤다 吏曹에서는 음이 서로 근사한 각 고을의 이름을 고치자고 제의하였다.  그에 따라 청주(淸州)는 北靑. 양주(襄州)를 襄陽. 녕산(寧山)은 天安. 보성(甫城)은 옛이름대로 珍寶. 보천(甫川)은 예이름대로 醴川. 횡천(橫川)은 橫城. 보령(保令)은 報恩으로 고쳤다<태종공정대왕실록 제3권 8月己巳日條”라고 기록함으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음을 알 수 있으나 이때부터 縣이 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우리 군은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三年山郡 통일신라시대에는 三年郡이었으며 고려 태조 때 寶齡(齡이 뒤에 令으로 변함)이 되었다가 顯宗9년(1018년)에 尙州牧에 합치었다가 明宗2년(1172년) 監務를 두게 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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